[결혼에 관하여 20선]<10>타인에게 말걸기

  • 입력 2009년 5월 12일 02시 58분


◇타인에게 말걸기/은희경 지음/문학동네

《“난 그이가 매일 일찍 들어오는 것도 싫다. 일찍 오는 것이 가정에 충실한 거라는 편견도 갖고 있지 않다. 자기 시간을 갖지 않는 인간은 고여 있는 물처럼 썩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나도 못 견딜 외로움이라니! 분명히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사랑을 이루고 나니 이렇게 당연한 순서인 것처럼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는 화려한 비탄이라도 있지만 이루어진 사랑은 이렇게 남루한 일상을 남길 뿐인가.”》

사랑이 지나면, 남는건 권태와 고독

예전엔 사색적으로 보이던 흰 손가락이 이제는 허약한 듯해 눈에 거슬리고, 늘 녹차를 주문하는 취향은 ‘저렇게 몸 생각이나 하고…’ 혀를 차게 만든다. 한때 낭만적이고 달콤하다 여긴 것들이 시간에 빛이 바래고 만다. 누구나 사랑할 때는 특별한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고 믿지만, 그 착각은 영원하지 않다.

함께여서 행복한 시간은 사라지기 마련이고 남는 건 나 자신뿐이다. 결혼이라는 울타리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싸늘히 식고 변해버리는 게 사랑의 본색이라는 것을 작가는 이 단편집을 통해 냉정하게 확인시켜 준다. ‘사랑이란 가소로운 허구’(문학평론가 황종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빈처’에서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월급을 안 갖다 주는 것도 아닌 평범한 남편은 우연히 아내의 일기장을 본다. 거의 매일 술 마시고 늦게 귀가하는 자신을 포기했나 싶었는데, 일기장에는 ‘이십대에도 애인 없던 시절이 있었는데 뭘. 그러면 쓸쓸함이 조금 줄어드는 것도 같다’라고 적고 있었다. “결혼하면 남자는 영원히 자기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 자기 아내를 소중히 할 줄을 몰라.”

아내는 가정에 썩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남편 때문에, ‘아줌마’가 돼 버린 처지 때문에 힘들어한다. 일탈을 꿈꾸기보다는 일기장 속에 남편을 애인이라 칭하고, 가정을 직장이라고 바꿔 쓰는 것이 그의 작은 탈출일 뿐이다. 아내는 지루한 일상을 이렇게 견딘다.

이삿날 남편이 출장을 가는 통에 사흘에 걸쳐 아내는 홀로 이삿짐을 풀었다. 그러다 허리를 다쳤다는 말에 남편은 미련스럽게 그걸 혼자 했느냐고 하면, 아내는 당신이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고 하고, 남편은 사람을 쓰지 그랬느냐고 되받고 아내는 이사 비용이 빠듯한데 어떻게 사람을 부르느냐고 하고 남편은 그만 듣기가 싫어져 알았으니 당신이 다 알아서 하라고 하고…. 작가는 그런 게 남편과 아내의 대화법이라고 꼬집는다.

‘연미와 유미’에서 동생 유미는 미모와 교양을 갖춘 언니 연미와 사사건건 비교당한다. 결혼을 재촉하는 부모에게 유미는 ‘내가 아무하고든 결혼만 했으면 싶은 거냐’고 대든다. 이때 언니가 보인 뜻밖의 반응. “결혼은 아무나하고 하는 거야.” 감정이란 변하고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은 변하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하는 것이 좋다는 설명이었다.

언니는 동생에게 말한다. 결혼한 다음부터는 삶에 대한 기대도 없었고 누구를 의지하는 마음도 없이 나 혼자 살아온 셈이라고. 혼자였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결혼은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미는 혼자가 될 수 있다면 결혼은 행복한 것이라는 결론을 찾는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님을, 늘 살아가는 일상의 연장일 뿐임을 작가는 꼭꼭 눌러 적고 있다. “결혼한 사람은 모두 불행을 견디고 있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견디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불행이 아니라 권태야. 하지만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현상을 바꿀 의지 없이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 권태의 장점이지.”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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