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박물관 100년의 사람들]<9>문화재 보존과학 이오희

  • 입력 2009년 5월 7일 02시 56분


한국에 문화재 보존과학을 처음 도입한 이오희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그는 “석탑 등 문화재는 온도 변화에 따라 생물학, 화학적 훼손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도 문화재 보존 문제와 직결된다”며 “문화재 보존과학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한국에 문화재 보존과학을 처음 도입한 이오희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그는 “석탑 등 문화재는 온도 변화에 따라 생물학, 화학적 훼손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도 문화재 보존 문제와 직결된다”며 “문화재 보존과학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원대연 기자
녹덩어리 가야 갑옷 복원 ‘임나일본부說’ 반박

1979년 가야 무덤인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에서 나온 철제 환두대도(고리자루칼)가 보존과학자 이오희 한국전통문화학교 초빙교수(61·당시 31세) 앞에 놓였다. 당시 철제 유물을 신경 써서 보존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이 교수는 녹슬고 형체도 보잘것없는 환두대도를 유심히 살폈다. 칼 위를 가득 덮은 녹을 조심스럽게 벗겨내던 그의 눈앞에 번쩍 하고 섬광이 스쳐 갔다. “상감이다!”

그때까지 한국의 고대 유물에서 상감 기법은 한 번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X선을 찍어야 한다고 했지만 당시 유물을 X선 촬영할 장비가 없어 무기류를 X선 촬영하는 회사로 달려갔다. 고리에 새겨 넣은 덩굴무늬 은(銀) 상감이 뚜렷했다. 한국 발굴사상 삼국시대에 사용된 상감 기법이 처음 발견된 순간이었다. 그 뒤부터 유물 보존처리에 X선 촬영이 보편화했다. 한국 문화재 보존과학의 개척자인 이 교수를 국립중앙박물관 이용희 보존처리담당관이 만났다.

이용희 보존처리담당관=국립박물관에 보존처리실을 처음 만든 것이 1976년입니다. 그 전에는 유물을 어떻게 보존처리했습니까.

이오희 교수=수장고에 있는 철제 유물의 카드 사진은 온전한데 실제로는 라벨만 있고 거의 바스러진 것도 있었습니다. 깨진 도자기나 수리가 필요한 회화는 서울 인사동의 수리, 표구업자에게 맡겼어요. 1970년대 초 백제 무령왕릉에서 나온 금제 유물들,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장니 등은 원자력연구소가 약품 처리했습니다. 그렇게 안 했으면 세계에 자랑할 만한 국보급 문화재가 거의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이 교수는 1975년 일본 도쿄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연수를 하고 1년 뒤 귀국했으나 보존처리실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같은 기간 대만에서 보존과학 연수를 한 이상수 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장(1998년 작고)과 함께 고고유물의 정리실로 쓰려던 박물관 3층 공간을 ‘점유’해버렸다. ‘윗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저지른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최순우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1916∼1984)이 점유를 허락했다. 한국 박물관사(史)에서 보존처리실이 처음 등장했다. 이상수 전 실장 얘기가 나오자 이 교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 교수와 함께 한국에 문화재 보존과학을 도입한 이 전 실장은 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상수 씨가 있었다면 이 인터뷰는 그의 몫입니다. 보존처리 실력이 무척 뛰어났어요. 국보 제275호 기마인물형토기를 해체 복원한 것도, 여러 파편으로 깨져 있던 국보 제193호 봉수형유리병을 원형 복원한 것도 그였습니다.”

이용희=국립박물관이 처음 보존처리한 유물이 서울 삼양동에서 출토된 국보 제127호 금동관음보살입상이었습니다.

이오희=집을 보수하다 우연히 출토된 불상이었죠. 이쑤시개에 보존처리 약품을 묻혀 10일간 불상 위의 녹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모두’라는 대목이 제가 후회하는 부분입니다. 유물은 오랜 세월을 견뎠고 표면의 녹과 이물질이 이 시간을 고색창연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깨끗하게만 하려다 그 흔적을 다 없앤 셈이죠.

이용희=보존처리는 유물의 새 면모를 알게 해줍니다. 국민들이 박물관에서 보는 문화재는 모두 보존처리를 거친 것이죠.

이오희=지산동 고분군에서 갑옷이 출토되기 전까지 가야시대의 갑옷이 제대로 나온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반면 일본에서는 비슷한 형태의 갑옷이 한 고분에서만 10점씩 나왔고 일본 학자들은 이를 임나일본부설의 증거로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녹덩어리가 보존처리 뒤 온전한 갑옷임이 드러났고 이때부터 가야 유적에서 갑옷을 의도적으로 찾기 시작했습니다. 갑옷이 계속 출토돼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중 하나가 사라졌죠.

그는 “보존과학자는 병원 의사와 똑같다”며 “부서진 유물을 복원하고(임상학) 유물이 어떻게 손상됐는지 연구(병리학)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 우리 곁의 문화재가 더 훼손되지 않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예방학)”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공동 기획: 동아일보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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