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방살이 출판사였지만 문인들 바글바글했죠”

  • 입력 2009년 5월 6일 02시 58분


창립 30돌 문학세계사 대표 김종해 시인

“문단 인맥 도움으로 성장… 한권 한권 목숨 걸고 만들어 아쉬움 없어”

《“호주머니 털어서 술값 모으는 데 한계가 생기면 내기 고스톱, 바둑 두기를 했어요. 그리곤 문학세계사 사무실에서 술판이 벌어지는 거죠. 송영 작가의 휘파람 실력은 문단에서 유명했어요. 다들 거기 맞춰 노래하고, 환호하고…. 시와 함께했던 정말 행복한 시절이었죠.”》

‘항해일지’ ‘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등 11권의 시집으로 현대문학상,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낸 김종해 시인(68·사진)은 올해로 창립 30주년을 맞은 출판사 문학세계사 대표다. 지금까지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 발행을 비롯해 김초혜 시집 ‘사랑굿’, 김소엽 시집 ‘그대는 별로 뜨고’ 등 1000권이 넘는 책을 출간했다.

창립 30주년을 맞아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의 문학세계사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시인이 운영한 이 출판사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 그 세월을 함께 부대낀 문단사를 분리하기 힘든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는 “친구 셋방에서 시작했던 출판사가 자리를 잡으면서 수표동, 봉익동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집필실도 만들었다”며 “하지만 말이 좋아 집필실이지 문인들의 놀이터였다”고 회상했다.

196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한 김 대표는 정음사에서 10여 년간 편집자로 일한 뒤 1979년 문학세계사를 세웠다. 셋방에서 시작할 만큼 열악했던 출판사가 자리를 잡는 데 김 대표의 문단 인맥이 큰 도움이 됐다. 당시 문학세계사를 즐겨 찾던 이들은 시인 김광림 이근배 정진규 김원호 장석주, 문학평론가 정규웅, 소설가 송영 김원일…. 한국문단의 한 축을 차지했던 쟁쟁한 문인들이다. 김 대표는 “주위에 있는 모든 동료, 선배들이 작가였기 때문에 원고 받기가 아주 쉬웠다”며 “출판사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스승이었던 박목월 선생의 유고산문집 ‘내 영혼의 숲에 내리는 별빛’ 등 베스트셀러를 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출판사가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던 만큼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그는 “김종삼 시인이 가끔 ‘극비리에 4000원만 융자해 주시면 활력소가 되겠습니다…’라고 적힌 쪽지를 내미시거나, 미국으로 이민 갔던 박남수 시인이 서울에 오실 때면 문학세계사를 찾아 후배 문인들과 어울리곤 하셨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간행된 책 중 시집, 시인연구, 문학평론집 등만 헤아려도 전체의 절반이 넘는다.

김 대표는 1979∼85년 ‘현대시를 위한 실험무대’를 기획해 시 낭송, 시극 공연을 펼쳤고 출판사가 안정기에 접어든 2002년에는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를 창간했다. 그는 “출판계와 문단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적자를 감수하고 만들었다”며 “대부분 기증본 형태로 시인, 비평가들에게 보내지만 좋은 시와 시인을 섬기며 사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다. 문학세계사는 1990년대 이후 살만 루슈디, 아멜리 노통브, 안나 가발다 등 해외 작가들을 발굴하거나 강풀의 만화를 펴내는 등 출판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럼에도 김 대표가 가장 애정을 느끼는 것은 역시 시인세계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교정에 이르기까지 다 참여해 활자 하나, 점 하나까지 꼼꼼히 살핀다. 앞으로 시인세계뿐 아니라 젊은 시인들의 시집 시리즈를 통해 유망한 신인들을 발굴하고 키워나갈 계획이다.

김 대표는 “책 한권, 한권 낼 때마다 생사를 걸고 만들었기에 아쉬움이 없다”며 “30주년 축하 메시지로 기 소르망은 ‘젊은 출판사’, 노통브는 ‘참 아름다운 나이’라고 했다. 이제 비로소 박차를 가하고 속력을 내야 할 때인 것 같다”고 말했다. 12일 오후 6시 반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김남조 이근배 신달자 시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30주년 기념행사를 연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 김종해 대표가 추천한 문학세계사의 시집 10

△박남수 ‘사슴의 관’(1981) △김춘수 ‘의자와 계단’(1999) △김남조 ‘바람세례’(1988) △홍윤숙 ‘경의선 보통열차’(1989) △이형기 ‘절벽’(1998) △신경림 ‘우리들의 북’(1988)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1990) △이근배 ‘노래여 노래여’(1981) △함민복 ‘말랑말랑한 힘’(2005) △조말선 ‘매우 가벼운 담론’(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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