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 쫄병’ 조승우 이경 “걸레짜는 일엔 귀신 됐죠”

  • 입력 2009년 4월 24일 03시 02분


■ 배우 → 서울경찰청 연극단원 변신 5개월째

나이 어린 고참들 모시며 내무반 청소-공연 궂은일

“제대하면 연애하고파

그런데 그날이 오려나”

흰색 경찰제복의 왼쪽 가슴에 달린 출입증에는 '조승우'라고 씌어 있었다. 사진 속 청년은 앞머리와 옆머리가 1cm 정도의 스포츠형 머리를 하고 있었다. 영화 '말아톤'에서 봤던 초원이의 천진한 표정 그대로였다.

22일 서울 종로구 내자동 서울지방경찰청 방송실에서 만난 조승우 이경(30)은 말이 느렸다. 기자의 질문을 곱씹은 뒤 군더더기 없이 말했다. 그에게는 조심스러운 자리였다. 군 생활 5개월째, 일반 부대로 치면 이등병 신분이라 언행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졸병이 무슨 인터뷰예요"라며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기자는 '삼고초려' 끝에 조 이경과 마주앉을 수 있었다.

조 이경과 기자는 올해 갓 서른이 된 동갑내기다. "군 입대와 동시에 서른이 됐는데 어떠냐"는 질문에 조 이경은 "부대 적응하느라 서른이 된 줄도 몰랐어요. 제대하면 꽉 찬 서른 한 살이겠네요"라며 웃었다.

조 이경은 지난해 12월 충남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뮤지컬 대통령'이라고 불리며 인기의 절정에서 군 입대를 택한 조 이경은 입대 두 달 전 찍은 영화 스태프들도 모르게 조용히 군에 갔다. 그곳에서 전경으로 차출돼 서울지방경찰청의 '호루라기 연극단'에 선발됐다. 이 극단은 장애우와 독거노인 위문공연, 어린이 범죄예방 관련 공연을 하는 경찰 유일의 공연단체. 조 이경 외에 탤런트 류수영 씨가 복무하고 있고, 연극영화과 출신 전경 13명이 소속돼 매년 150여 회 정도 공연을 다닌다.

13명의 단원 중 밑에서 세 번째인 조 이경은 고참들보다 나이가 예닐곱 살 정도 많다. 동료들은 이름 끝 자에 옹(翁)을 붙여 '우 옹'으로 부른다. 그래도 졸병은 졸병. 아침, 저녁 점호를 앞두고 내무반 청소를 할 때는 무조건 걸레 당번이다. 아무리 두꺼운 걸레도 물 안 나오게 짜는 데는 '귀신'이 됐다고 한다.

사회에선 뮤지컬 스타였지만 군에선 이경의 역할이 있다. 연극단의 음향과 조명을 담당하는 스태프, 난타 북치기, 야광봉 퍼포먼스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남는 배역이 있으면 전천후로 뛴다.

"여긴 스텝이 따로 없어요. 모두가 배우 겸 댄서 겸 스태프죠. 음향이나 조명은 경찰에 와서 처음 배웠어요. 낮엔 공연하고 밤엔 레퍼토리 짜고 안무 연습하고… 바깥보다 시간이 빨리 가요."

초등학생들을 대상한 뮤지컬 '라이언킹'에서도 조 이경은 주연격인 '심바'가 아니라 '해설 원숭이'를 맡기로 했다. 조 이경은 "앞에 서서 눈에 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팀을 위해서 저에게 가장 맞는 캐릭터를 맞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대하면 가장 먼저 해보고 싶은 게 뭐냐는 질문에 조 이경은 3분 가까이 생각하다 "연애요"라고 답했다.

"다들 아시는 분(배우 강혜정)과 헤어진 뒤 짧게 연애를 한 적은 있지만 오랫동안 제대로 연애를 못 했어요. 주말에 선임들이 애인과 외출 나가는 걸 보면 참 부러워요. 좋은 인연 만나서 알콩달콩 지내고 싶은데 그날이 오려나…."

"마음만 먹으면 연애를 하는 게 어렵진 않을 것"이란 기자의 반응에는 "연애가 어떻게 쉬울 수 있겠어요. 마음이 맞는 사람과 인연을 맺는 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요"라고 되물었다.

스타가 아닌 전경으로 무대에 서면서 조 이경은 "앞만 보고 달려온 20대를 되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경찰 제복을 입은 조 이경에게 관객들을 냉정하다. 주 관객층이 어린이나 노인들이라 조 이경을 못 알아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팬들을 상대로 공연할 때는 실수를 해도 이해해주고 재미가 없어도 관심 있게 봐주지만 아이들은 가차 없어요. 조금만 지루해도 '저 아저씨 재미없다'며 쏘아붙이죠. 무대에서 면박을 당하다 보면 내가 처음 연기할 땐 어떻게 했었나, 내 초심은 뭐였나를 생각하게 되요."

지방에 공연갈 때면 조 이경도 앞뒤로 군장을 메듯 온몸에 공연소품을 짊어진 '보따리장수'가 된다. 전용차가 없어 택시와 기차를 번갈아 타며 전국 곳곳을 돌다 밤 12시가 넘어 숙소인 서울경찰청에 돌아오면 녹초가 된다.

"입대 전에는 지방공연 갈 때 비행기나 KTX 타고 편하게 다녀왔죠. 새벽에 세면장에서 땀범벅이 된 속옷을 빨다 보면 이 모든 걸 대신해주는 사람이 있었구나, 내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 그렇게 많았구나 하고 깨닫게 되요. 추운 날 찬물에 빨래하면서 손이 여기저기 터지기도 했거든요."

여느 장병들처럼 조 이경도 전경생활을 하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놨다.

"누나(뮤지컬 배우 조서연)와 저, 어머니 세 식구가 살다가 지금은 누나가 영국유학을 가서 어머니 혼자 집에 계세요. 옆에서 보살펴드리지 못해서 늘 마음이 쓰이죠. 관객으로 오신 어머니들이 "반갑다"면서 손을 꼭 잡아주시면 가끔씩 짠해요."

23일 오전 호루라기 연극단은 서울 동대문구청에서 열린 '녹색어머니연합 및 명예경찰소년단' 발대식에 공연을 갔다. 이날 아침도 소품상자를 끌어안은 조 이경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입대 전 성대결절 수술을 해 한동안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조 이경은 이날 오랜만에 노래를 선보였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의 삽입곡인 '디 임파서블 드림(The Impossible Dream)'이었다. 노래가 끝나고서야 "어머, 정말 조승우였어"라는 어머니들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40분 동안의 식전 공연을 마친 단원들은 나란히 무대에 서 '충성'을 외쳤다. 동료들 사이에서 선 조 이경은 체구가 가장 작았다. 하지만 짐을 챙겨 버스로 향하는 길, 그는 가장 큰 북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신광영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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