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카페]나도 한때 쇼퍼홀릭… 이젠 구두 고쳐신어

  • 입력 2009년 4월 24일 03시 01분


세계적 럭셔리 브랜드들이 공격적인 마케팅을 한 건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들어서야 ‘명품 열풍’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죠. ‘쇼퍼홀릭, ‘신상녀’란 말도 나름 ‘신상(신상품)’인 셈입니다.

고백하건대, 저도 한때 쇼퍼홀릭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유행이 한물간 크리스찬 디오르의 핸드백을 유명 스타들이 들고 다니는 사진을 보면 가슴이 뛰었습니다. 길거리를 걸을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그 가방 생각뿐이었죠. 상상이 잘 안 되는 남자 독자들이라면 골프에 처음 맛들일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패션 잡지를 보면 이것도 사야겠고, 저것도 사야겠다고 머릿속이 분주해졌습니다. 고려시대 문인 이조년이 ‘다정도 병인 양’이라더니, 제게 쇼핑은 일종의 병이었습니다.

쇼퍼홀릭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무조건 신상품에 열광하는 게 초보 단계라면,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춰 나가는 게 2단계입니다. 저는 2단계에 들어서는 백화점 할인 행사장에 ‘누워 있는’ 세일 물건들을 하이에나처럼 찾아 다녔습니다. 과거 영화롭게 걸려 있던 그 옷들은 패션의 유효기간을 넘기고 애통하게 대접받고 있었기에 잘 골라내면 스타일을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3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쇼퍼홀릭’이란 말과 작별해야겠습니다. 3단계는 ‘쇼핑 초탈자’니까요. 이젠 신상품이 나와도, 세일 정보를 접해도 무심해졌습니다. 값싼 물건부터 럭셔리 제품까지 넘쳐나는 요즘엔 패션 세상을 평정할 ‘독보적인’ 히트 제품도 없습니다. 지난해부터 ‘클래식’ 바람이 불면서 샤넬 2.55백의 매출이 올라갔지만, 너도나도 들고 다니는 그 가방이 과연 나의 이미지를 얼마나 품격 있게 높여줄지 의문입니다. 뭔가를 샀다는 심리적 효용보다 ‘괜한 돈 썼다’는 죄책감이 더 큽니다.

요즘엔 사은행사로 받는 천 장바구니도, 명동 길거리에서 파는 값싼 손 자수 지갑도 다 예뻐 보입니다. 얼마나 내 몸과 정신을 평온하게 해 줄 수 있는지가 쇼핑의 주요 기준이 됐습니다. 실은 트렌드를 버려야 스타일을 얻습니다. 잘 안 신던 구두 여러 켤레를 수선해 신었더니, ‘또박또박’ 구두 소리가 문득 반갑기까지 합니다.

국내 패션업계의 ‘쇼퍼홀릭’들은 한결같이 “이젠 내 스타일에 맞는 물건만 신중하게 산다”고 입을 모읍니다. 명품이라면 무조건 사족을 못 쓰던 여성들도 그 브랜드가 자신의 ‘패션 정체성’과 얼마나 잘 맞는지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럭셔리 업계가 이제 공략할 대상은 바로 ‘쇼핑 초탈자’가 아닐까요. 지금까지 승승장구했던 럭셔리 업계가 어쩌면 가장 힘든 도전을 맞게 된 시점인 듯합니다.

김선미 산업부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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