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런던의 이방인들, 마음속 비탈에 서다…‘하얀 이빨’

  • 입력 2009년 4월 4일 02시 55분


자메이카 이민자인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영국 작가 제이디 스미스. 스물다섯이던 2000년 영국 사회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삶을 날카로운 위트로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첫 장편소설 ‘하얀 이빨’을 발표하며 영국 문단의 차세대 작가로 급부상했다. 사진 제공 민음사
자메이카 이민자인 어머니와 영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영국 작가 제이디 스미스. 스물다섯이던 2000년 영국 사회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삶을 날카로운 위트로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첫 장편소설 ‘하얀 이빨’을 발표하며 영국 문단의 차세대 작가로 급부상했다. 사진 제공 민음사
◇ 하얀 이빨/제이디 스미스 지음·김은정 옮김/408, 420쪽·각권 1만3000원·민음사

영국 런던의 윌즈던 그린(Willesden Green). 북부 런던에 있는 이 지역은 도시 내에서도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서 온 이민자와 노동자가 많이 사는 곳이다. 길거리에 ‘말리의 케밥집’ ‘말코비치 제과점’ 등 영국적이지 않은 여러 문화권의 상점이 섞여 있고, ‘어퍼컷 또는 주변정리, 오늘의 머리, 내일은 없으리’ 등 말장난을 자랑스럽게 써놓은 채 문을 닫은 미용실이나 어울리지 않는 간판을 달아놓은 낡은 샌드위치 가게가 즐비하다. 부촌은 아니지만 빈민촌이라고도 할 수 없는, 뒤죽박죽 섞인 문화권처럼 어딘지 어정쩡한 곳.

영국의 떠오르는 젊은 작가 제이디 스미스(34)의 입심 넘치는 이 장편 데뷔작은 작가가 영국인 아버지와 자메이카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성장했던 런던의 윌즈던 그린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은 ‘100만 부 이상 판매’ ‘타임이 선정한 100대 영문소설’ 등의 수식어가 붙기 전부터 유명세를 치른 작품. 1975년생인 작가가 케임브리지대 재학 시절 쓴 80쪽 분량의 초고를 출판 에이전시에 공개하자 출판사들이 치열하게 계약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출간 전부터 기대를 모은 이 소설의 등장인물은 서로 다른 이유로 윌즈던 그린에서 살게 된 이민자 가족들이다. 우선 아치네 가족을 보자. 아내에게 버림받은 비참한 기분에 자살을 시도했다 우연찮게 구조된 백인 중년남성인 아치는 그날 운명적으로 만난 열아홉 살의 자메이카 출신 소녀 클라라에게 반해 새로 결혼한다. 독실한 신도였던 어머니의 종교적인 구속을 못 견뎌 했던 클라라는 아치가 자신을 멀리 모로코나 이탈리아로 데려가 줄 수 있으리라 믿고 그를 따라 나선다. 하지만 아치의 능력으로 데려갈 수 있는 곳은 윌즈던 그린의 이층집뿐.

이곳에는 아치와 절친한 친구이자 제2차 세계대전에 함께 참전했던 방글라데시인인 사마드 익발의 가족도 함께 살고 있다. 고등교육을 받았는데도 영국의 인도음식점에서 카레를 나르고 있는 사마드는 아내 알사나와 함께 ‘못사는 동네’에서 ‘덜 못사는 동네’로 이사하기 위해 뼈 빠지게 일을 한다. 이슬람교도인 그에게 영국에서의 삶과 신앙의 조화는 늘 풀기 힘든 숙제다. 그는 갈등을 겪을 때마다 금기를 하나씩 어기는 대신 다른 금기를 지키는 식으로 알라신과 ‘공정 계약’을 체결한다. ‘외도’하는 대신 ‘금식’을 하는 식이다. 그는 외도에 대한 죄책감 끝에 아이들이라도 바른 신앙인으로 키우기 위해 방글라데시로 보내려고 하지만 그나마 돈이 부족해 두 아들 중 마기드만 보낸다.

소설은 이들을 중심으로 이민자들이 영국에 정착한 뒤 2세를 낳고 키우면서 겪는 일까지 얼추 삼대에 걸친 사연과 온갖 소동을 유쾌하게 풀어나가며 마지막 반전을 향해 달려간다. 아치와 클라라 사이에서 태어난 육중한 몸매의 아이리는 백인의 외모를 갖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사마드와 알사나의 아들 밀라트의 눈에 들어보려 애를 쓴다. 영국에서 자란 밀라트는 대마초를 입에 물고 금발의 여자 아이들과 뒹굴기 바쁜 미소년 갱스터가 됐다. 하지만 이미 이들 세대까지 이르면, 영국 사회 속에서 다양한 뿌리와 역사를 가진 이민자들의 삶은 다문화 사회 속에 녹아들어 간다. “너희는 매우 이국적이구나. 실례지만, 어디에서 왔니?”라는 질문에 이들은 동시에,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윌즈던요”라고 말한다. “‘원래는’ 어디에서 온 거지?”라고 재차 이어지는 질문에 이들은 “화이트 채플. 런던 왕립 병원과 207번 버스를 지나서요”라고 대답한다. 아이리가 아빠가 누군지 알 수 없는 아이(밀라트 혹은 마기드)를 임신하게 되는 결말도 마찬가지. 아이리는 ‘누군가의 아이가 아니라면, 누구의 아이도 아닌 것인가?’라며 ‘뿌리’(혹은 출신)의 의미를 묻는다.

해설을 쓴 민은경 서울대 교수는 “소설의 제목인 ‘하얀 이빨’은 흑인 인종 차별과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이자 백인 제국주의의 약탈과 잔인함을 상징한다”며 “하지만 이 소설의 메시지는 조화로운 다민족 다인종 사회가 가능하며 다문화 사회가 이미 하얀 이처럼 단단하게 영국에 뿌리를 내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호와의 증인, 이슬람 근본주의자, 동물보호주의자에서부터 흑인과 백인, 아시아인, 레즈비언에 이르기까지…. 인종, 종교, 신념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한 사회 속에 뒤엉켜 살며 만들어내는 소동들을 유쾌하게 그렸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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