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34년 가야금 명인 한수동 씨 타계

  • 입력 2009년 3월 3일 02시 58분


망국의 설움, 산조에 담아

그의 손가락에선 가야금 선율이 꽃처럼 피어났다. 가야금 대가 한숙구의 외아들 한수동(1903∼1934). 가야금 연주가 일품이었으며 대금 해금 피리에도 능통했다. 키가 크고 잘생겨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가야금 산조 계보에 따르면 한숙구는 제1세대, 한수동은 2세대로 꼽힌다. 한수동은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아 가야금 산조에서 일가를 이루지만 요절한 탓에 오늘날 전해 내려오는 음악이 거의 없다.

한숙구, 수동 부자는 가야금뿐 아니라 대금도 ‘명인’이었으며 못 다루는 악기가 없었다고 한다. 한숙구의 대금 시나위는 꽤나 유명했고, 대금 명인 한주환도 한수동에게 대금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한수동의 안타까운 죽음은 일제강점기 국악인들의 삶과 연관돼 있다.

이들은 모멸과 천대 속에 ‘떠돌이 인생’으로 구름처럼 흘러 다니는 처지였다. 가끔 전남 화순의 부유한 토반인 오판기처럼 풍류방을 만들어 한수동(가야금·거문고·대금), 한주환(대금), 오진석(피리) 등 쟁쟁한 음악인들을 뒷바라지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정처 없이 떠돌아야 했다.

한수동은 창악인(唱樂人)들이 만든 예술단체 협률사(協律社)에 소속돼 전국을 다니며 공연을 했다. 이 단체에선 소리꾼과 산조 연주자 그리고 기생이 함께 생활했다.

협률사는 승무와 검무, 판쇠, 가야금 산조와 병창 등을 선보였다. 변변한 공연장도 없어 천막을 치고 관객 300∼400명과 더불어 나라 잃은 슬픔을 우리 음악으로 달랬다.

정처 없이 떠돌다 보니 생활은 엉망이었다. 떠돌이의 외로움과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연주자들은 공연 뒤 기생들과 즐기는 등 방탕한 생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빠지지 않았던 것이 바로 아편이었다.

당시 아편 피우는 것을 ‘멋진 행위’쯤으로 여기는 예술가가 많았다. 그러나 아편은 불법이어서 경찰에 잡히면 대부분 징역을 살았다. 한수동도 아편을 즐기다 적발돼 8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이때 그의 가야금 소리를 즐기던 이완용이 일본 경찰청에 서한을 보내 그날로 석방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수동은 아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1934년 3월 3일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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