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에 단호하되 주변엔 다정했던 ‘혜화동 할아버지’

  • 입력 2009년 2월 17일 02시 56분


■ 김 추기경의 인간미

“좋은것 나쁜것, 오물까지 담을수 있어” 아호를 ‘옹기’로

임신부 위독 소식에 “살려달라고 하느님께 떼쓰듯 기도”

회고록선 “처자식과 오순도순 사는 삶 부러울때도 있어”

김수환 추기경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독재와 강자의 불의에는 단호하게 맞섰지만 겸손하고 청빈한 삶과 따뜻한 인간미로 사랑과 존경을 받아 왔다.

‘옹기장학회’에 얽힌 사연이 대표적이다. 김 추기경은 2002년 세례명을 딴 ‘스테파노 장학회’ 설립을 제안받자 대신 옹기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당시 김 추기경은 “옹기는 천주교 박해시대 때 신앙 선조들이 산 속에서 구워 내다팔면서 생계를 잇고 복음을 전파한 수단이자 좋은 것과 나쁜 것, 심지어 오물까지 담을 수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옹기가 김 추기경의 아호라는 것은 최근 알려졌다.

1969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추기경으로 임명되는 서임 행사가 열렸다. 김 추기경은 로마에 가면 대중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벤츠를 타는 것이 당시 관례였다. 김 추기경은 처음에는 벤츠를 탔지만 이용자가 택시비의 2배를 내야 하는 것을 알고 이후 택시만 탔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1984년 5월 한국 교회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을 앞두고 평소 두 갑까지 즐기던 담배를 2개월 전부터 끊었다. 하지만 당시 전례를 맡은 관계자가 방한하던 날 담배를 권하자 “오늘같이 기쁜 날 안 피우면 언제 피우겠느냐”며 담배를 물기도 했다. 그해 9월 책상에 담배와 라이터를 둔 채 담배를 끊었다.

1998년 76세로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는 여기저기에 ‘영원한 젊은 오빠, 사랑해요’라는 팻말이 나타났다.

“팻말이 보이는데 가슴이 울컥 하더군요. 하지만 30년 교구장직 점수는 이것저것 평균을 내면 60점 정도죠. 더 후하게 줄 자신이 없습니다.”

그는 운전면허증을 따서 방방곡곡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김 추기경이 아니라 김삿갓이 되겠다는 것. 노령인 자신의 건강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어 운전면허는 포기했다.

김 추기경은 30년 가깝게 자신의 ‘발’이 돼 준 운전기사 김형태 씨(요한)가 성실하고 운전 잘하고 마음씨가 곱다며 가장 가깝게 지낸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7년 공개된 일화는 ‘혜화동 할아버지’로도 불려 온 고인의 인간적인 체취를 더욱 짙게 느끼게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배 속 아기와 자신의 생명 중 택일을 해야 한다는 유치원 교사의 쪽지를 받았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두 생명을 모두 구해 달라고 한참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말미에 ‘하느님, 그 자매님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제 체면을 봐서라도 꼭 들어주십시오. 사람들은 추기경이 기도해 주면 뭔가 다를 거라고 믿습니다’라며 하느님께 ‘떼’를 썼습니다.”

김 추기경은 또 2004년 출간된 회고록 등을 통해 “결혼해 처자식과 오순도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며 “어린 시절 장사하는 것과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고 싶기도 했다”고 밝혀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했다.

고인은 한국 교회의 가장 큰어른이었지만 신앙과 스스로에 대해서는 언제나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임했다.

‘사랑해’ ‘등대’가 ‘18번’이라고 밝힌 고인은 윤동주의 ‘서시’를 몹시 좋아하지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게 많아 감히 읊어볼 생각을 못했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언제부터인가 병세가 위독한 선후배 신부들을 병문안할 때 귀에 바싹 대고 “하느님한테 맡기세요. 하느님한테 모든 걸 다 맡기세요”라고 말했다. 물론 스스로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 23장 1절)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동아닷컴 임광희 기자


▲동아닷컴 정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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