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로 꾸린 ‘情 보따리’

  • 입력 2009년 2월 16일 02시 58분


일본 도쿄 모리아트센터 갤러리의 개인전에서 사람의 두상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조각을 선보인 전광영 씨. 그는 “풍요를 누리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를 꾸짖는 작품”이라며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며 미술인들의 이정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도쿄=고미석 기자
일본 도쿄 모리아트센터 갤러리의 개인전에서 사람의 두상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조각을 선보인 전광영 씨. 그는 “풍요를 누리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를 꾸짖는 작품”이라며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며 미술인들의 이정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도쿄=고미석 기자
전광영 씨의 ‘집합 07-D121’.
전광영 씨의 ‘집합 07-D121’.
전광영 씨, 도쿄 모리아트센터 갤러리서 대규모 개인전

“가깝고도 먼 일본. 그것도 도쿄 심장부에 자리한 모리아트센터 갤러리의 전관에서 내 작업을 펼쳐 보이다니…비행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올 때 마음이 싸했다. 40여 년간 활동하면서 가장 뜻 깊은 전시라 오늘 밤 숙소로 돌아가면 펑펑 울 것 같다.”

○ 우리의 정과 한을 보자기로 감싸는 작업

얼굴은 상기되고 목소리는 차츰 높아졌다. 13일 오후 롯폰기힐스 모리타워 52층에 자리한 갤러리에서 만난 작가 전광영 씨(65). 3월 15일까지 한 달간 한지로 싼 삼각형 스티로폼을 쌓아 완성한 ‘집합’ 시리즈 31점을 선보이는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970년대 초기 회화를 비롯해 무채색에서 채색으로, 평면에서 입체로 확장되는 ‘집합’의 진화를 보여 주는 전시다.

“서양이 박스 문화라면 우리 문화는 보자기 문화다. 100온스 상자에는 10온스 상자 10개만 들어가지만 보자기는 다르다. 시집간 딸을 생각하며 바리바리 담아주는 어머니의 보따리를 생각해 봐라. 한지를 통해 일본에 우리의 보자기 문화, 정의 문화를 알리고 싶다.”

강원 홍천군 산골에서 자란 어린 시절에 보았던 한약방 천장의 약봉지들이 한지 오브제의 뿌리가 되었다. 작은 오브제를 평면이나 입체로 차곡차곡 붙이는 작업 과정엔 손이 많이 간다. 하지만 추상회화를 그리듯 하나씩 붙여 나가는 오브제들이 수천 개, 수만 개 겹치고 밀집하며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구구절절 이야기를 펼친다.

“한지는 우리 민족의 얼이자 혼이다. 오래된 고서를 사용하는 이유는 책이 내 손에 닿기까지 보이지 않는 조상의 숱한 손길을 거쳤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스티로폼을 포장했지만 그 속에 이름 모를 남녀노소의 지문과 사연이 담겨 있어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작품이다.” 무채색 평면작업을 통해 심리적으로 공허하고 불안한 현대인의 감정을 표현했던 작가. 최근엔 염색한 한지를 사용해 고운 색감과 서정성이 두드러진다. 이번 전시에선 고뇌하는 인간의 두상과 심장을 연상시키는 대형 조각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그는 “건국 이래 가장 큰 풍요를 누리면서도 눈만 뜨면 지지고 볶고 싸우는 오늘의 우리를 꾸짖는 작품”이라며 “배를 곯아도 콩 한쪽도 나눠 먹던 조상을 떠올리며 정서적 치유의 힘과 현대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 캐나다 싱가포르 미국 등 해외 전시 잇따라

이날 그는 일본 기자 20여 명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 “우리 역사의 흔적이 담긴 한지 작업은 조상의 영혼을 보자기로 감싸는 작업”이라며 “조용한 작품 같지만 그 속에 숱한 목소리가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전시를 둘러본 아사히신문의 오니시 와카토(大西若人) 기자는 “멀리서 보면 작은 결정체 같은 느낌을 주는데, 가까이서 보면 종이에 인쇄된 한자가 보이는 등 색다르고 흥미롭다”고 평했다.

한편 이날 개막식에는 이 전시의 실행위원장을 맡은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게이오대 교수를 비롯해 권철현 주일본대사, 천정배 의원, 표미선 한국화랑협회장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전 씨는 올해 이번 전시에 이어 캐나다 싱가포르 러시아 미국에서의 전시가 잡혀 있는 등 세계무대에서 고유의 소재를 활용한 작품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도쿄=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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