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명 만세 물결 그곳, 표지석 하나없이 집들만…

  • 입력 2009년 2월 13일 02시 59분


<중> 전국서 독립만세 함성

― 안성 화성 천안 당진 익산 함안

3대 항쟁지 안성 주민들 “그런 유적인지 몰랐다”

일본 순사 처단했던 화성 현장에도 수풀만 무성

202만명 참가 ‘독립전쟁’에 일반인 관심 사라져

“시위 자료 발굴됐는데도 복원 외면 안타까울뿐”

《7일 경기 안성시 양성면. 동아일보와 동행한 박환(한국근대사) 수원대 교수가 양성초등학교 뒤편의 논을 가리켰다. 이어 양성면사무소에서 50m 떨어진 KT 안성지점 양성 분기국과 현 양성우체국에서 50m 떨어진 주택을 찾았다. 이곳은 안성시 원곡면과 양성면 일대 3·1운동 참가자들이 불태운 옛 일본 경찰 주재소(논), 서류와 집기를 꺼내 태운 옛 일제 면사무소(KT 양성 분기국)와 우편소(주택) 터였다.》

안성은 황해도 수안, 평안북도 의주와 함께 3·1운동 3대 항쟁지로 꼽힌다. 그러나 양성초교 안에 ‘안성 3·1독립운동 발상지’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을 뿐, 동아일보와 동북아역사재단이 찾아본 만세운동 현장에는 역사적 장소라는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이 없었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은 “그런 사연이 깃든 터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90년 전 4월 1일 밤 원곡, 양성면 주민 2000명은 양성면 경찰 주재소를 불태운 뒤 우편소와 면사무소에 돌을 던지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4월 14일까지 800여 명이 검거되고 19명이 목숨을 잃었다. 가옥도 276채가 불탔다.

박 교수는 “최근 독립기념관의 ‘국내 사적 실태 조사’를 감수하는 과정에서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의 정확한 위치가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며 “이런 상황이라면 개발 과정에서 만세운동 터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이후 4월까지 전국으로 확산됐으나 지방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지방의 역사’라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했다. 동아일보는 경기 안성시 화성시, 충남 당진군, 전북 익산(이리)시, 경남 함안군 등 3·1운동의 주요 현장을 찾았다.

○ 독립전쟁, 3·1운동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명 중 29명이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서 독립을 선언한 이후 4월까지 남녀노소, 신분, 계급, 종교를 넘어 전국에서 일어났다.

독립운동가 박은식(1859∼1925) 선생에 따르면 참가자는 202만3089명, 사망자는 7509명, 부상자는 1만5961명, 검거자는 4만6948명에 이르렀다. 일제는 극심한 탄압을 저질렀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비교적 평화적이었던 서울과 달리 전국으로 확산된 3·1운동은 ‘독립전쟁 수준’(재일사학자 강덕상 재일한인역사자료관장)이라고 불릴 만큼 격렬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신문은 3·1만세운동 대열을 ‘독립군’이라고 표현했다.

○ 일본 순사 처단한 화성 3·1운동

3월 26∼28일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에서 1000명이 참여한 만세운동은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를 처단하는 등 화성 3·1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전국에서 일본 순사를 처단한 곳은 이곳과 화성시 우정면 화수리뿐이다. 만세운동 대열이 가득 찼던 길은 사강시장을 가로지르는 도로로 변했고 순사를 처단한 현장에는 수협 사강지점이 들어섰다.

4월 3일 화수리에서 주민 2000여 명은 경찰 주재소를 불태운 뒤 일제로부터 참혹한 보복을 받았다. 독립운동가 정한경(1891∼1985) 선생은 그에 대해 “완전무결하게 황폐한 모습이었다. 단 한 장의 이불, 한 가마니의 쌀, 단 한 개의 그릇, 숟가락도 성한 것이 없었다”고 묘사했다.

7일 직접 찾아가본 현장은 수풀로 덮여 있었다. 박 교수는 “당시 상황이 담긴 자료가 발굴돼 만세운동 과정을 복원할 수 있는데도 기념행사가 열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 “죽어서는 묻힐 땅도 없다”

1919년 4월 4일 충남 당진군 대호지면 주민들은 7km 떨어진 천의면 경찰 주재소로 행진해 일본 경찰과 맞섰다. 독립기념관 이정은 책임연구위원은 “면장, 면직원, 지역 유지 등이 조직적으로 나선 독특한 만세운동이었다”고 말했다. 면장인 이인정 선생은 말을 타고 대열을 이끌었다.

이들은 ‘애국가’라는 제목의 노래도 불렀다. “간교한 일본은…내 나라를 약탈했다/우리들은 이러한 통탄할 지경에 이르니/살아서는 설 곳이 없고/죽어서는 묻힐 땅도 없다…불구대천의 원수를 갚아/무궁전세의 내 국가를 독립하자!”

이곳 3·1운동 연구자인 당진군 호서고 김남석 교사는 “후손들이 3·1운동 유공자들의 형사 기록을 찾지 못했다면 대호지 만세운동은 잊혀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919년 4월 4일에는 전북 익산시 이리시장에서도 1000명이 외치는 독립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순국 장소에는 1948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친필 순국열사비가 세워졌다. 만세운동이 일어난 익산역(당시 이리역)에도 1971년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졌으나 1990년대 역 주차장 끝으로 밀려났다. 현재는 안내판의 글씨도 상당수 벗겨져 알아보기 힘든 상태다.

○ “33인 대표와 유관순 열사만 안다”

3월 19일 경남 함안군 비봉산에서는 주민들이 3·1운동을 하늘에 알리는 고천제를 연 뒤 일제 관공서로 갔다. 특히 함안 경찰 주재소에 출동해 있던 마산경찰서장 기타무라에게 함안군민이 독립 만세를 불렀다는 사실 증명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그 다음 날 함안군 군북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서는 20여 명이 일제의 총격에 한꺼번에 순국했다.

현재 함안군 충의공원에는 3·1운동 참가자들의 위패 192위가 모셔져 있다. 이규석 향토문화연구소장은 “경남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났지만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연구위원은 “민족대표 33인과 유관순 열사 외에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일반인들이 잘 모르고 있어 안타깝다”며 “역사를 기억해야 미래가 있다”고 말했다.



안성·화성·천안·당진·익산·함안=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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