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풍속 이야기 20선]<16>욕, 그 카타르시스의 미학

  • 입력 2009년 2월 13일 02시 59분


《“욕, 욕설, 욕지거리. 어떻게 부르든 그것은 그늘의 말, 음지의 말이었다. 어엿한 한국어면서도 시궁창쯤 됨직한 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악구 험담 험구 등으로도 불린 욕은 욕된 처지를 감수해야 했다. (…) 우리는 스스로 똥을 누면서도 똥을 피해왔듯이, 스스로 욕하고 욕 들으면서도 욕을 피해왔다. 이제 욕과 맞대면하면서 우리 각자와 정면으로 대좌해야 한다. 우리 내면과 스스럼없는 맞선을 보아야 한다.”》

‘두룽박 쓴 야시’는 무슨 뜻?

신화 전설 민담 등을 통해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탐구해 온 김열규 서강대 명예교수. 그가 말하는 우리말의 욕은 “민간의 행위, 짓거리, 그 소산”의 일부다. 욕은 그것이 갖는 역사성과 사회성으로 인해 한국문화의 상(像)을 만들어 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문제의식으로 욕의 미학과 해학을 파헤친다.

욕에는 문학작품만큼이나 다양한 수사법(修辭法)이 녹아 있다. 예컨대 얼간이를 가리키는 경북 고성 지역의 욕인 ‘두룽박(둥근 구멍이 뚫린 통박) 쓴 야시(여우)’를 비롯해 ‘제 아비 메치고 힘자랑할 놈’ ‘모기 하문(下門)에 말 ○○ 박기’ 등에는 각각 비유법과 과장법, 대조법이 쓰이고 있다. 이러니 바보는 욕쟁이가 될 가망이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욕은 성(性)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욕이 남녀의 성기와 성행위를 즐겨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쾌락이자 때때로 죄악인 에로스의 이중적인 성격 때문에 욕은 성에 탐닉하는 색한(色漢)처럼 보이기도 하고, 성을 억압하는 금욕주의자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말한다. “주체궂어서(처리하기 어려울 만큼 짐스럽고 귀찮은 데가 있어서) 사람들은 성에 복수할 겸 성을 욕감태기(늘 남에게 욕을 먹는 자)로 삼았다”는 것이다.

북유럽과 그리스 신화처럼 우리나라 신화에도 욕이 담겨 있다. 저자는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아니 곧 내면, 구워서 먹으리’라는 내용의 삼국유사 ‘가락국기’ 첫머리를 인용한다. 목숨 가진 것을 구워 먹겠다는 말부터가 이미 악담이고 험구, 악설(惡舌)이니 “나라의 개벽과 욕의 개벽이 때를 함께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의미다.

욕에도 품격이 있다. 해학과 기지가 담겨 있지 않은 쌍욕은 뱉는 사람에게 되돌아올 뿐이다. 쌍욕을 해봤자 입만 더러워질 뿐 욕먹는 대상이 바뀔 리 없기 때문. 우리 욕 가운데 악매(惡罵·매우 심한 욕)라고 하는 악담 욕이 많은데 이 역시 쌍욕과 마찬가지로 피해야 할 욕이다. ‘염병할!’ ‘벼락 맞아 죽어라’와 같은 욕이다. 사람이 처지가 약해지고 경우가 궁해질수록 논리에 약해지고 이성에서 멀어지는데 이럴 때 “악담욕이 독을 뿜고 쌍욕이 악을 쓴다”고 한다.

쌍욕이나 악매와 달리 독기가 거의 빠지거나 악감정에서 한발 뒤로 물러선 욕에는 익살이 있다. ‘별, 새 뒤집어 날아가는 소리’와 같은 욕이다. 방랑생활 중 들른 한 마을에서 자신에게 쉰밥을 먹인 일을 얘기하며 “망할(마흔) 놈의 마을에서 쉰밥 먹이더라(四十村中 五十食)”라고 한 김 삿갓의 욕은 이미 예술적 경지로 승화한 욕이다.

책에는 심청가에서 뺑덕어멈이 다른 봉사와 눈이 맞아 도망간 것을 알아챈 심 봉사가 “예끼, 천하에 무정한 ○”이라고 한 욕을 비롯해 수궁가와 흥보가, 양주별산대놀이와 봉산탈춤 등 옛 문학과 예술작품에서 뽑은 ‘욕 모둠’도 담겨 있다. 술술 풀어 쓴 ‘욕 백과사전’인 셈이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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