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여백]국순당 배중호 사장

  • 입력 2009년 2월 13일 02시 59분


전통주 연구에 바쁜 사장님

“나이 들수록 요리가 좋네요”

《국순당 홍보 담당자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 사장님이 요즘 요리에 푹 빠지셨어요. 한, 중, 일식은

물론 분식까지 직접 만드신다니까요. 그뿐인가요. 최근엔 김장도 손수 하셨어요.”

호기심이 발동했다.

1993년 선보인 백세주를 만드는 회사, 전통주 업계의 ‘거목(巨木)’ 배상면 국순당 회장의 장남이 운영하는 회사라는 게 기자가 국순당에 대해 갖고 있던 얄팍한 상식이었다.

“사장님을 꼭 뵙고 싶군요.”

‘요리하는 최고경영자(CEO)’인 배중호(56) 국순당 사장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물냉면-파전 손수 만들어… 식당메뉴 직접 개발

술 맛있게 즐기려면 어울리는 음식 곁들여야

○ 고되지만 보람 있는 우리 술 복원 작업

서울 강남구 삼성동 국순당 본사 로비에 들어서자 고운 갈색 개량한복을 입은 여직원이 손님을 맞았다.

잠시 들른 화장실 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붙어 있었다.

‘소중한 우리 것들 오래오래 함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정갈하면서도 따뜻한 회사 분위기가 전해져왔다. 모습을 드러낸 배 사장도 갈색 개량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 회사 유니폼이었다.

사옥의 옥상엔 탄천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 직원 휴식공간이 있었다.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인테리어가 돼 모던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니바에 배 사장과 나란히 앉았다.

―국순당이 지난해부터 한국의 전통주를 복원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작업이 쉽지는 않을텐데요.

“집에서 빚는 술인 가양주(家釀酒)는 고구려 주몽신화 등 아주 옛 문헌에도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술이 가장 꽃 핀 시기는 조선시대에요. 유교 문화에서 술을 못 팔게 하니까 사람들이 집에서 술을 많이 담가 조선 말기엔 우리 술의 종류가 600여 개나 됐습니다. 하지만 문헌을 참고해 복원한 전통주의 맛이 옛 맛 그대로일지는 검증할 길이 없어요. 그게 안타깝습니다.”

국순당은 지난해부터 ‘전통주 복원 프로젝트’를 펼치고 있다. 창포를 원료로 삼은 창포주, 배꽃이 필 무렵 담그는 고려시대 막걸리인 이화주, 후추를 사용해 매콤한 자주, 그해 수확한 햅쌀로 빚어 추석에 마시는 절기주인 신도주, 소나무 가지로 빚은 약주인 송절주 등을 복원했다. 그중 마셔본 이화주는 희고 걸쭉한 느낌이 떠먹는 요구르트 같아 흥미로웠다.

지난해 말에는 40대의 일본인 여성 프리랜서 작가가 배 사장을 찾아와 1주일 동안 우리 술의 역사와 제조법을 배우고 갔다고 한다.

“솔직히 창피하더군요. 외국인도 관심을 갖는 우리 술을 정작 한국인들은 너무 도외시하는 것 같아요. 술도 음식 문화의 한 종류이기 때문에 우리 술의 경쟁력을 높이려면 결국 한국 음식의 경쟁력을 높여야 합니다.”

○ 즐겁게 요리하는 CEO…파전, 물냉면, 김치

국순당 본사 1층에는 국순당의 민속주 판매 프랜차이즈 식당인 ‘백세주 마을’이 있다. 이곳의 메뉴판 첫 페이지에는 ‘우리 술을 가장 맛있게 즐기는 방법’이 소개돼 있다. ‘술의 빛깔을 먼저 느끼고, 술의 향을 맡아 그 은은한 향에 취하며, 술을 마심으로 그 깊은 맛을 음미한다. 마지막으로 술에 어울리는 음식을 곁들여 그 조화를 만끽한다.’

배 사장이 직접 만든 이 메뉴판은 한국의 맛을 세계에 알리는 좋은 본보기가 될 듯싶다. 술은 각 제품 사진과 함께 와인처럼 풍미, 단맛, 신맛을 옆에 표기해 놓았다. 또 각 음식 메뉴에는 이에 어울리는 술을 소개했다. 솔잎 보쌈과 겉절이 김치엔 백세주 담, 백다랑어 구이와 생들깨유 샐러드엔 명작 복분자 등이 어울린다.

배 사장은 닭 가슴살 샐러드와 파전을 능숙한 손놀림으로 만들어 보였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여성화(女性化)하나 봐요. 요리가 좋아요.(웃음) 아버지(배상면 국순당 회장)는 술 개발에 전념 안 하고 요리에 신경 쓴다고 못 마땅해하지만요.”

사실 요리에 대한 그의 관심은 백세주 마을의 메뉴 개발로 연결된다. 배 사장이 개발한 백다랑어 구이와 생들깨유 샐러드는 백다랑어의 겉만 살짝 익히고 야채에 올리브유를 사용하지 않아 깔끔한 우리 술 맛과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배 사장이 평소 집에서 잘 만드는 음식은 물냉면이다. 닭 육수와 멸치 등을 넣고 이틀 걸려 정성스레 냉면 육수를 만든다고. 3년 전부터는 김장도 담그기 시작했는데, 특히 이번 겨울 김장하는 모습은 비디오카메라로 담아두기도 했단다. “군대에 있을 때, 하사관 부인들이 담가오는 김치가 너무 맛있었어요. 그 비결은 땅에 묻는 발효였죠. 우리 음식과 술은 과학이에요. 얼마 전 미국에 유학 간 딸을 만나러 가서는 김치찌개와 시래깃 국을 만들어주고 왔어요.”

○ “한국 전통주 교육 아카데미 세워 우리 술 알릴 것”

백세주가 나온 지 벌써 17년째다. 한때 연매출 1600억 원이었던 이 회사의 매출은 절반으로 줄었다. 와인과 사케에 밀려 우리 술이 설 땅이 좁아졌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집 안에 술 연구소를 둬서 술 냄새를 맡고 자랐죠. 하지만 회사 경영을 하면서 너무 조급하게 서두른 것 같아요. 한때 선보였던 ‘별’이란 술은 향이 특이해서 소비자들의 거부감이 있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끈기 있게 (좋은 결과를) 기다렸어야 했어요.”

배 사장은 우리 술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올해 하반기에 한국 전통주 교육 아카데미를 만들겠다고 밝혔고, 본보는 이 내용을 보도했다.(본보 1월22일 B6면 참조)

국순당 홍보 담당자는 다음 날 “동아일보 기사를 읽은 독자들의 문의가 쇄도해 업무가 마비될 정도”라며 “전통주에 대한 수요가 이렇게 많은 줄 미처 몰랐다”고 말했다.

“사장님은 뭐라시던가요?”라고 묻자 그는 말했다.

“껄껄 웃으시며 동치미 담그러 가겠다고 하시던 걸요.”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 배중호 사장은

가업이어 민속주 제조

백세주 빅히트로 명성

배중호 국순당 사장은 배상면(83) 국순당 회장의 장남. 아버지인 배 회장이 1983년 설립한 국순당의 전신인 배한산업에 1980년 입사했다. 가업(家業)을 이을 생각으로 연세대 생화학과를 나온 그는 1993년부터 국순당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여동생은 배혜정 누룩도가(탁주업체) 사장, 남동생은 배영호 배상면주가 사장이다.

1993년 백세주를 선보인 데 이어 2001년에는 민속주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프랜차이즈 식당인 ‘백세주 마을’을 열었다. 지난해부터는 잊혀졌던 우리의 전통주를 매월 한 품목씩 되살리는 ‘전통주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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