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돈·꿈…11월을 닮은 ‘3色 기다림’ 의 가을 공연 3편

  • 입력 2008년 11월 21일 08시 04분


고독한 계절이다. 아스팔트에 뒹구는 낙엽조차 흔적을 감추어 간다. 성큼 다가온 추위에 옷깃을 여미는 11월, 가을과 겨울이 뒤섞여 마음의 기온도 함께 서늘해진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마지막 잎사귀를 부여잡고 싶은, 가을의 로망이 강한 ‘추남(秋男)’들을 위한 연극 세 편을 소개한다. 생활고에 허덕일지라도 무언가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쓸쓸한 남자’들이 등장하는 연극이다. 이들은 무엇을 그리 기다리는 걸까?

홍대 산울림 ‘고도를 기다리며’

산울림 소극장의 무대 앞, 노을빛 조명이 닳아빠진 구두 한 짝을 비춘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그림 ‘구두’처럼 색도 바래고, 끈도 낡아버린 허름한 남성용 구두다.

잰걸음으로 오늘도 걷고 내일도 걷고 줄기차게 걸어도, 도통 사는 이유를 모르겠다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연출 임영웅)를 보자.

허무한 기분도 잠시! 추레한 옷차림에 낡은 구두를 신은 블라디미르, 에스트라공이 사는 게 어떤 건지 축약해 보여준다.

체념마저 반복되는 게 곧 일상이다. 주인공은 나무 앞에서 ‘고도’라는 인물을 만나려고 무의미한 행동을 되풀이하지만, 도통 원인을 알 수가 없다. 기다리는 이유도, 24시간이 지속되는 이유도 모른다.

주인공도 관객도 아무도 고도를 만나지 못한다. 심지어 원작자 사무엘 베게트조차 “내가 그걸(고도) 알았더라면 이미 작품 속에 썼을 것 아니오”라는 말로 관객을 미궁에 빠뜨리기도 했다.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고도지만 둘은 또 기다리고 기다려야 한다. ‘알 수 없으나 알고 싶은’ 그 과정이 곧 삶이라는 것을 둘의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대사를 통해 느낄 수 있다. 이번 작품은 2008년 한국, 아일랜드 수교 25주년을 기념해 산울림 극단이 사무엘 베게트의 모교, 트리니티 대학에서 공연했던 귀국작이다. 1만원∼3만원, 02-334-5915.

남산 국립극장 ‘피고지고 피고지고’

60대 버전 ‘범죄의 재구성’이다.

젊은 시절 도박과 사기로 일관했던 3명의 남자가 다시 대박을 꿈꾼다. “노친네일수록 꿈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이들은 ‘왕오’, ‘천축’, ‘국전’이라고 개명까지 했다. 무교동 낙지골목에서 만난 ‘혜초’의 귀띔 아래 남은 인생을 돈황사 도굴에 맡긴 것이다. 3년 동안 파고 또 파고, 보물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과연 이들은 보물을 얻어 마카오로 도주할 수 있을까? 왕오, 천축, 국전은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원래 마음과 머리는 따로 노는 법!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 아니던가”라고 말하지만 정작 요정마담 ‘난타’에게 젊어 보이려고 애쓰고, 혹시라도 무교동 혜초에게 사기 당한 것은 아닌지 전전긍긍해한다.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가득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이들의 대화는 극도로 허무하다. “어디쯤엔가 우리가 살만한 별들이 또 있겠지? 안 그래?”, “지금까지 산 것도 다행이지” 라고 체념한다. 그리고 다시 보물을 바란다. 꽃이 피고지고 피고지며 개화를 반복하듯, 60대 사기단은 허무와 욕망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연극 ‘피고지고 피고지고’(연출 강영걸)는 15년 전 초연 그대로 출연진, 연출진이 돌아왔다. 1993년의 티켓이나 배우 사진 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료 공연을 관람하고, 공연뒤풀이까지 함께 할 수 있다.

2만원∼5만원, 02-2280-4253.

대학로 두레홀 ‘밀키웨이’

여기 하는 일마다 꼬이는 남자가 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을 쳐도 좀처럼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

월남전에 참전한 주인공 성호는 고향에 돌아왔지만, 죽은 사람 취급을 당했다. 전사자로 처리됐기 때문이다. 별안간 억울한 범죄인의 누명을 쓰고, 이후로 변변한 일터도 갖지 못한 채 모진 생활을 견뎌낸다.

그래도 그는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다.

“내 별은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저 은하계에선 수많은 별들이 생겨나잖아요”라며 자신만의 ‘밀키웨이’(은하수)를 꿈꾸며 살아간다.

좀처럼 인생은 마음대로 풀리지 않지만, 행복해지기 위해 애쓰는 ‘자유’만큼은 자신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절름발이는 언제나 절름발이야”라고 자조하기에는 주인공의 희망은 무척이나 강했다.

연극 ‘밀키웨이’(연출 김명곤)는 연극 속의 연극이다. 정신병원의 의사와 환자인 두 남자가 출연해 극 중에서 또 하나의 연극작품을 선보인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구성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칼 비트링거의 ‘은하수를 아시나요?’(1958)를 한국의 일제시대, 1970년대 등 각 시대상황을 고려해 각색한 작품이다. 2년 만에 소극장 연극 무대로 돌아온 김명곤 연출의 2인극이다. 단 두 명이 2역, 6역을 번갈아하며 관객들에게 웃음을 준다. 1만5000원∼3만원, 02-741-5978.

변인숙 기자 baram4u@donga.com

사진제공 | 극단 산울림, 국립극장, 극단 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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