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인의 법과 사회]종교화합은 공직자의 의무

  • 입력 2008년 9월 9일 02시 56분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과 서,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이스탄불은 지정학적 위치만큼이나 정치적 종교적으로 수많은 풍상을 헤쳐 나왔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로마 가톨릭의 영향권이었으나 나중에는 그리스정교의 중심이 된다. 오스만제국의 등장과 더불어 이스탄불로 개칭되면서 이슬람이 지배한다. 하지만 터키공화국의 국부 무스타파 케말은 정교분리를 구현한다.

비잔티움제국의 영화를 상징하는 소피아 성당은 중세 건축기술의 정수다. 성당을 감싸 안은 성화와 문양은 동시대 가톨릭의 표상이다. 오스만제국은 이스탄불을 지배하면서도 소피아 성당을 불사르는 대신 성당에 각인된 모자이크에 회칠을 가한 뒤 그 위에 이슬람 교리를 입혀나갔다. 문화유산을 보전하면서도 새로운 지배의식을 펼쳐나간 모범 사례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20세기에 펼쳐진 이념논쟁과 종교 갈등의 와중에 많은 문화유산이 참혹하게 파괴된다. 근본주의자들은 아예 인류의 역사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만행을 저지른다. 중국은 문화혁명 과정에서 홍위병을 앞세워 역사와 종교를 말살시키려 했다. 마오쩌둥을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로 칭송하더라도 이 점에 관한 한 역사의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거대 석불을 박격포탄으로 파괴한 야만적 행태 또한 지탄받아 마땅하다.

역사상 수많은 종교적 갈등을 이겨낸 인류의 지혜는 근대국가의 정립과정에서 헌법상 국교부인과 정교분리 원칙을 정립시킨다. 우리만큼 이를 슬기롭게 포용한 국가와 민족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랜 내공을 통해 한민족의 문화적 정신적 지주로 작동하는 호국불교, 관혼상제에서 생활 예법으로 정착한 유교, 근대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기독교와 천주교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 터 잡고 있다. 특히 기독교는 독립운동과정에서 민주시민의식을 크게 고취시켰다. 이승만 김구 같은 민족 지도자가 기독교에 귀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동안 국가 지도자들은 나름대로의 금도(襟度)를 발휘함으로써 국민통합 종교화합의 장을 마련했다. 이명박 정부의 출범 이후 ‘고소영’ 내각이라는 비아냥거림의 한가운데 있는 교회문제로 온 나라가 어지럽다. 일련의 친기독교 반불교적인 행태에 분출된 갈등은 마침내 사상 유례가 없는 시청 앞 광장의 불교도대회로 이어졌다.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쓰지 말자. 대통령은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야 한다. 헌법상 천명된 정교분리 원칙은 공직자의 행위전범이다. 일부 공직자와 국가기관이 저지른 종교 편향적 행태는 발본색원돼야 한다.

차제에 종교인도 그릇된 행태에 대한 근본적 자성이 뒤따라야 한다. 굳이 천주교의 일사불란한 기강을 찬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와 불교계는 자기 정화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가톨릭 사제서품에 맞먹는 엄격한 성직자 양성이 필요하다.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성직자의 일탈과 비리는 근절돼야 한다.

100m가 멀다 하고 이어지는 십자가 불빛과 난립을 거듭하는 신학교는 기독교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대형 교회의 부자 세습은 한국 교회를 종교의 탈을 쓴 권력기관으로 전락시킨다. 불교는 그간 호국불교의 미명 아래 권위주의 시절에 보여준 친정부적 행태에 대한 성찰이 요구된다. 승려 양성과 교육과정의 투명성도 제고해야 한다. 대형 불사에 매몰된 기복신앙도 시정해야 한다.

남북 분단과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이겨낸 국민에게 종교는 정신적 구원의 등불이다. 종교가 고도의 윤리성과 상대방에 대한 관용을 저버린다면 사교(邪敎) 집단과 마찬가지로 매도될 수밖에 없다.

성낙인 서울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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