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송설당은 근대 육영사업 어머니”

  • 입력 2008년 4월 21일 02시 54분


송진우-여운형 선생과 함께 1935년 당시 자신의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최송설당 여사(앞쪽)가 축하하러 온 고하 송진우(뒷줄 왼쪽), 몽양 여운형 선생과 자리를 함께했다. 사진 제공 경인문화사
송진우-여운형 선생과 함께 1935년 당시 자신의 동상 제막식에 참석한 최송설당 여사(앞쪽)가 축하하러 온 고하 송진우(뒷줄 왼쪽), 몽양 여운형 선생과 자리를 함께했다. 사진 제공 경인문화사
■ 생애 본격 조명 연구서 나와

“최송설당(崔松雪堂)의 사업은 우리가 천언만어(千言萬語)로 그 공덕을 말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스스로 빛나게 될 것이다.”

고하 송진우는 1935년 11월 최송설당(1855∼1939) 동상 제막식에 참석해 그의 업적을 이렇게 평가했다. 경북 김천에 김천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최송설당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보모를 지냈다. 전 재산을 교육운동에 바친 ‘근대 육영사업의 어머니’였고 한시와 국문가사 등을 발표한 조선의 마지막 궁중 여류 시인이기도 했다.

최송설당의 업적을 7명의 학자가 연구한 논문집이 최근 나왔다. 이 중 김희곤 안동대 교수, 김호일 중앙대 명예교수 등은 ‘한국 육영사업의 어머니 최송설당’(경인문화사)에서 최송설당의 생애와 김천고보 설립의 의의 등을 살폈다.

‘최송설당 연구’를 쓴 김희곤 교수는 최송설당이 거금을 모으게 된 경위를 살폈다. 1896년 서울로 온 최송설당은 엄비(嚴妃·영친왕의 어머니)의 눈에 띈 뒤 영친왕이 태어나자 덕수궁에 입궐해 보모가 됐다. 그 뒤 궁궐을 나오면서 엄비로부터 받은 토지가 최송설당 재산의 바탕이 된 것으로 김 교수는 추정했다.

김 교수는 “자선사업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최송설당은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재산을 정리하는 방법으로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초점을 뒀다”고 말했다.

김호일 교수는 ‘최송설당의 교육 이념과 교육 활동’이라는 글에서 “남성이 대부분인 민족 교육 운동가들의 틈바구니에서 홍일점 여성으로서 전 재산을 쾌척한 것은 애국애족의 신념을 가진 여장부가 아니고선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인문계 학교 설립을 방해하자 최송설당은 서울의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투입하는 배수진을 쳐 총독부의 승인을 이끌어낸 것으로 전해진다. 1930년 3월 5일자 동아일보는 김천고보 설립을 밝힌 최송설당의 성명서 전문(全文)을 싣기도 했다.

“사회의 발전은 인재의 교육에 있는데, 지금 만약 재정이 궁핍하다는 이유로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면 사회의 급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에 삼십만 이천일백 원을 내어서 그것으로 설립의 자금을 댈까 한다.”

김 교수는 “최송설당의 교육관은 몸과 마음의 청결을 통해 인간을 건전하게 육성하고, 공부와 노동에서의 근면을 통해 실천적 자주 인간을 만드는 데 있었다”고 평가했다.

전 재산을 기부한 뒤에도 학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던 최송설당은 1939년 6월 16일 생을 마감했고, 동아일보는 8월 12일부터 ‘고(故) 송설당 여사의 49재를 당하야’라는 특집 기사를 4부에 걸쳐 실었다.

“영원히 사립학교를 육성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교육받은 한 사람이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으며, 교육받은 한 사람이 동양을 편안하게 진정시킬 수 있다. 마땅히 이 길을 따라 준수하되 부디 내 뜻을 잃어버리지 말라.”(최송설당의 유언 중에서)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