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채와 실망사이]‘에반게리온 서’

  • 입력 2008년 1월 22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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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의 파일럿인 신지는 내성적이고 타인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된 채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젊은 세대들을 상징한다. 사진 제공 태원엔터테인먼트
‘에반게리온’의 파일럿인 신지는 내성적이고 타인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며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된 채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젊은 세대들을 상징한다. 사진 제공 태원엔터테인먼트
《마니아들을 열광케 했던 ‘애니메이션의 전설’을 이제 극장에서 만난다. 24일 개봉(서울은 19일)하는 ‘에반게리온 서’(이하 ‘서’·12세 이상). 1995년 일본에서 방영된 26부작 TV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극장용 4부작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그중 첫 번째 작품인 ‘서’는 TV 시리즈 1∼6회 에피소드에 해당하며 앞으로 ‘파’ ‘급’, 그리고 ‘완결판’ 등 3편이 더 개봉될 예정이다. 제목인 에반게리온은 극중 등장하는 미래 사회의 생체병기를 지칭하는 말. 2015년 제3 신도쿄 시를 배경으로 인류를 위협하는 정체불명의 ‘사도’에 대항해 인류를 지켜 내는 에반게리온에 탑승하는 파일럿들의 활약을 다뤘다.》

○ ‘에반게리온’ 팬이라면…생생 전투장면 vs 식상한 이야기

★좋았어=‘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컴퓨터그래픽(CG)으로 재탄생한 그래픽. 10여 년 전 TV 애니메이션에 비해 훨씬 정교하고 생생해졌다. 압권은 후반부에 나오는 전투 ‘야시마 작전’ 장면.

TV판에서는 단순한 마름모꼴에 불과했던 적군 캐릭터 ‘라미엘’은 극장판에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에반게리온이 사용하는 무기도 세련되고 정교해졌다.

주인공 신지 캐릭터의 미묘한 변화도 흥미롭다. 상관인 미사토에게 반항하며 가출한 뒤 다시 돌아오는 과정 등 “TV 시리즈에서는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캐릭터였던 신지가 ‘서’에서는 능동적인 모습으로 변화를 보여 준다.”(영화평론가 김봉석)

☆아쉬워=전체적인 줄거리나 흐름은 TV 시리즈와 큰 차이가 없어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후반부에 나오는 야시마 작전 전의 이야기는 거의 TV시리즈의 재편집 수준이어서 “반가움은 있지만 새로운 감동은 없다”(영화평론가 정지욱). TV 시리즈 삽입곡 중 가장 유명한 곡인 ‘플라이 투 더 문’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쉬움이다.

○ 저패니메이션 팬이라면…음모적 줄거리 vs 불친절한 전개

★좋았어=에반게리온은 종교, 설화, 역사 등에서 모티브를 차용한 저패니메이션 특유의 음모 가득한 전개가 돋보인다. ‘사해문서’에서 주로 모티브를 따온 에반게리온은 정식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구약 외경에 등장하는 이야기에서 소재를 많이 가져왔다. 세피로트의 나무, 아담 12사도 등 경전을 변형한 모티브를 첨가해 암울한 미래를 그리는 에반게리온은 어둡고 지적 게임을 즐기는 마니아에게 추천할 만하다.

☆아쉬워=에반게리온의 모호한 결말이나 전후 관계를 설명하지 않는 불친절한 전개 등은 ‘공각기동대’, ‘아키라’와 같은 SF 저패니메이션에 익숙한 마니아들도 어려워하는 부분이다. 안노 히데아키 총감독은 “이전 에반게리온 영화보다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고 말했으나 어디까지나 그의 기준에서일 뿐. 모호함과 불친절은 여전하다.

‘이웃집 토토로’ 등 미야자키 하야오로 대표되는 즐겁고 따뜻한 감수성의 저패니메이션을 기대했다면 당혹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 보통 관객이라면…성찰적인 내용 vs 셀 화면의 한계

★좋았어=월트 디즈니류의 교훈적인 애니메이션에 싫증난 관객이라면 정체성의 문제, 타인과의 소통, 오이디푸스콤플렉스 등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제기하는 이 작품에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아쉬워=최근 애니메이션의 대세는 입체감이 돋보이는 최첨단 ‘3D’. 하지만 ‘서’는 10년 전 셀 애니메이션의 아날로그적 느낌을 유지해 화면이 고전적이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는 “‘태권브이’ 같은 복고 애니메이션을 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마니아 양산… 관련상품만 6000종

■ 에반게리온 신드롬은

1995년 10월 일본에서 TV 시리즈로 처음 선보인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은 일본은 물론 당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뤄지지 않았던 한국에서도 불법 비디오를 통해 수많은 마니아 팬을 낳은 작품. 일본에서는 에반게리온 관련 상품만도 6000종이 넘고 만화책도 1500만 부가 팔려나갔다.

이 작품이 신드롬을 일으킨 것은 독특한 주제 덕분이다.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개인적 사회관과 기독교 세계관을 결합시킨 이 작품은 인류 구원과 존재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이야기했다.

특히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에반게리온으로 활약하지만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자문하며 현실을 도피하려는 주인공은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하며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일본의 ‘오타쿠’를 상징하기도 한다.

TV 방영 후 인기를 끌자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이번에 개봉하는 ‘에반게리온 서’는 ‘데스 앤드 리버스’(1997년),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1997년) 등에 이은 세 번째 극장판. 지난해 9월 일본 개봉 시 역대 최소 스크린(84개)으로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국내에서는 2004년 케이블 채널 ‘애니원’을 통해 TV 시리즈가 소개됐고 극장용으로 선보이는 것은 ‘서’가 처음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이었던 ‘서’는 티켓 판매 후 25분 만에 5000석 전석이 매진됐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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