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시인 24명 추억의 사랑 담은 에세이 ‘떨림’ 펴내

  • 입력 2007년 11월 3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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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르 떨리니 사랑이더라

“지금도 뜨겁게 사랑하고 있으며 사랑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영원한 사랑의 실연자(失戀者)다.”(시인 문정희)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잊은 지 오래다. 직장에서 살아남고자, 남보다 뒤처질까 자식들을 다그치느라 사랑이라는 비실용적인 단어는 머릿속에 떠올릴 틈이 없다. 그렇게 움츠러들고 메마르기 쉬운 겨울에, 뜨거운 사랑의 기억을 일깨워 주는 산문집이 나왔다. ‘떨림’(랜덤하우스)은 김용택 도종환 안도현 씨 등 더없이 예민한 시인 24명의 사랑 이야기다.

인천 강화에 살고 있는 함민복(45) 씨가 H에게서 오랜만에 전화를 받은 때는 돼지 자궁 속에 손을 넣고 새끼를 꺼내려던 참이었다. 죽은 새끼 일곱을 꺼낸 뒤라 접을까 싶었지만, 사내는 ‘그래도’ 하면서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세로 전화를 받는다. “저는 H라고 합니다. 기억하시겠어요?” 마음을 두었던 사람에게서 느닷없이 연락이 올 때의 심정,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린다. 이어지는 유쾌하고도 순한 대화. “시간 있으면 나오실래요?” “지금 막 나오려고 해요.” “뭐가요?” “지금 돼지새끼를 받고 있거든요.” 어린 돼지의 코에 인공호흡을 하고 탯줄을 끊어주어 세상에 보내는 모습은, 다가온 사랑의 향기로 세상이 새롭게 보일 사내의 모습과 겹쳐진다.

어떤 글은 오래 함께해온 사랑의 소중함을 새삼 일깨운다. 문태준(37) 씨가 마음에 둔 여성에게 고백을 한 것은 1년이나 지나서다. 그녀의 생일에 백합꽃 몇 송이를 주면서 쪽지를 함께 건넸다. “그때 처음으로 가슴속으로 사람이 들어서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도 남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일상처럼 가만히 옆에 앉아서, ‘사랑이 진행되는 소리’를 듣는다. “사랑이나 삶은 작은 생선을 굽듯 해야 한다는 말을 나는 그때 알았을까.” 오래 기다린 사랑과 결혼을 했고, 두 명의 아이를 얻었다. 수박을 사 들고 가는 저녁, 달그락거리는 밥상, 아이와 알몸으로 목욕하는 밤을 얻었다.

혼자서만 간직하고 싶은 기억을 끄집어낸 이도 있다. 중학교 3학년, 정호승(57) 시인에게는 TV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난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다가 창밖에 선 사촌 누나를 본다. 창이 닫혀 있어 소년 소녀는 입 모양만으로 마음을 헤아리며 대화를 한다. “어떤 시집이고?” “윤동주” “니가 윤동주를 다 아나?” “그래, 윤동주는 시와 삶이 일치된 시인이라고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그러다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 입술을 대버린다. 어쩌다 생긴 것으로 넘길 수도 있었던 일. 그런데 사촌 누나가 서른 중반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죽어, 영영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시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돼버렸다.

경북 안동에서 분묘 이장하던 중 발견된 400년 전 사랑의 편지 한 통에 감동해 시공을 뛰어넘는 사랑을 성찰하는 도종환 시인,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나는 계기가 된다고 짚어내는 고형렬 시인, 사랑은 ‘생각하는’ 게 아니라 ‘하는’ 것이라고 일러 주는 박형준 시인…. 시인들이 감수성 짙은 문장으로 전하는 러브 스토리는 가슴에 불 질렀던 사랑의 기억을 다시 한 번 일깨운다. 그렇게 불려나온 뜨거움은 삶에 커다란 에너지가 된다.

“작은 풀에도 사랑이 들어 있는데 정작 사랑에 가난한 것은 사람이 아닐까.”(시인 천양희)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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