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세종을 넘어선 樂王 예술계 樂風反正도 꾀했다”

  • 입력 2007년 1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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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음악적 재능과 식견에서 세종을 능가한 군주였습니다.” 조선 후기 음악사를 개척해 온 송지원(사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최근 ‘정조의 음악정책’(태학사)을 펴냈다. 서울대 국악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1992∼97년 KBS 국악 프로그램 작가와 진행자로 활약했던 그가 학계로 돌아간 뒤 내놓은 첫 단행본이다.》

2002년부터 계간 ‘문헌과 해석’에서 우리 역사 음악가들의 사연을 발굴해 맛깔 난 글 솜씨로 소개한 ‘음악가 이야기’의 필자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에겐 의외로 딱딱한 이론서지만 그 내공은 만만치 않다.

그는 이 책에서 TV 드라마 ‘이산’에서 문무겸전의 멋쟁이로 나오는 정조가 음악적 재능에 있어서도 세종을 능가한 조선조 최고의 악왕(樂王)이었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한국의 재래 음악 및 서역 전래 음악을 합한 향악(鄕樂), 삼국시대 이후 중국 전래의 의례음악을 중심으로 한 당악(唐樂), 중국 고대 제례악인 아악(雅樂)의 악보와 악기 악곡을 정리하고 악서(樂書)를 편찬했다. 또한 박연을 시켜 음률을 통일하고 편경과 편종 등을 새로 제조케 했는가 하면 새로운 악보로서 정간보 등을 창안했다. 이 때문에 세종에 비견될 조선조 왕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송 연구원은 이런 통념을 깨고 “정조가 이룬 음악 업적은 양과 질에서 세종을 뛰어넘는다”며 “세종이 문물정비기 왕으로서 독창성을 발휘했다면 정조는 문물완비기의 왕답게 유교 예악정치의 완성을 꿈꿨다”고 말했다. 쉽게 말해 세종이 모차르트였다면 정조는 베토벤이었던 셈이다.

세종에게 박연이 있었다면 정조에겐 서명응이 있었다. 정조는 세손 때 스승이었던 서명응을 특별히 발탁해 음악 이론서로서 ‘시악화성’과 ‘시악묘계’ 그리고 국가전례 전반에 쓰이는 악장 모음집인 ‘국조시악’ 등을 편찬케 하고 직접 그 서문을 썼다.

정조는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실린 ‘악통’을 직접 썼다. 또한 그는 ‘춘관통고’와 같은 대규모 국가전례서에서 ‘예로써 다스리고 악으로써 조화를 꾀한다’는 예악사상을 새롭게 고취했는가 하면 규장각에서 자신이 직접 육성한 ‘초계문신’을 ‘지악지신(知樂之臣)’으로 키우기 위해 특히 악론(樂論)을 강조했다.

정조는 비단 이론에만 밝았던 것이 아니었다. 세종이 악공들도 구별하지 못하는 음의 오차를 집어낼 정도의 절대음감을 가졌다면 정조는 궐내 악공과 악생을 전원 소집해 개별 연주와 합주 때 문제점을 일일이 집어내는 ‘카리스마의 음감’을 과시했다.

송 연구원은 이런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에 버금가는 악풍반정(樂風反正)을 펼쳤다고 주장했다. 문체반정은 정조가 고답적 한문 문체를 벗어나 개성을 추구한 박지원과 이옥 등의 문체를 잡문(雜文)이라 비판하며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의 회복을 주창한 것을 말한다.

송 연구원은 정조가 예악정치의 이상이 조선에서 실현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예에 비해 악의 조화가 무너졌다는 인식 아래 빠른 음악을 선호하는 당시 사람들의 음악 성향을 거부하고 완만한 고악(古樂)의 회복을 기도했다는 점에서 이를 ‘악풍반정’이라 이름 붙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선 문체반정이나 악풍반정이 모두 개성을 억누르는 반동적 행태로 비치지만 최고 통치자의 관점에선 엄청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중심을 잡기 위한 안간힘이 아니었을까요. 다양한 부분이 조화를 이루는 음악처럼 예악정치의 실현을 꿈꾸는 통치자와 자신의 음악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천민 출신의 악공들이 어우러져 당대의 역사가 빚어진다고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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