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푹 빠진 리얼리티 TV… 쏙 빠진 ‘리얼리티’

  • 입력 2007년 9월 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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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채널 4’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빅 브러더’. 저자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비추는 이런 프로그램들이 동물원의 동물 관람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사진출처 영국 ‘채널 4’
영국 ‘채널 4’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빅 브러더’. 저자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비추는 이런 프로그램들이 동물원의 동물 관람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사진출처 영국 ‘채널 4’
◇텔레비전과 동물원/올리비에 라작 지음·백선희 옮김/232쪽·1만2000원·마음산책

TV에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범람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나와 부부 간 내밀한 문제도 털어놓고, 젊은 남녀가 ‘연애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말썽꾸러기 아이가 차츰 나아지는 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 주는 프로그램도 있다.

리얼리티 신드롬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다. 1999년 네덜란드에서 젊은 남녀 10명을 한 공간에 모아 일상을 중계한 ‘빅브러더’가 영국의 ‘채널4’ 등으로 확산된 이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홍수를 이루고 있다.

이런 프로그램은 보통 사람들의 솔직한 ‘참여’와 ‘고백’으로 세상의 진실에 다가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흥미를 위한 연출 조작 실태가 드러나고, 불륜 등 선정적인 아이템이 넘치며 훔쳐보기를 자극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 책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대한 비평서다. 그 비평은 위에서 말한 지적을 되풀이하는 게 아니라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이 어떻게 제작자와 출연자, 시청자를 길들여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지를 파헤친다.

책의 전반부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유럽이나 미국에서 유행했던 인종 전시회를 조망한다. 라플란드인 가족과 순록을 정원에 데려다 놓고 관람료를 받은 독일의 카를 하겐베크, 에스키모 코사크 소말리아인을 잇달아 보여 준 파리의 전시 등이 그것이다. 이 인종전은 원주민의 일상을 리얼리티를 표방한 스펙터클(볼거리)로 제공하기 위해 전시물(인종)을 조련(연출)한다는 점에서 동물원과 다를 바 없다.

후반부에선 인종전시장과 동물원의 상관관계가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동물원으로 치환된다. 동물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리얼리티 TV에서도 똑같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들은 전시물(무명 출연자)과 관객(시청자) 길들이기를 통해 현실을 스펙터클로 만든다. 출연자는 무대장치(TV)와 주거지(현실)의 모호한 구분, 연출자의 교묘한 조련, 자신의 이미지를 위한 과장 등으로 길들여진다.

시청자는 일상에 독점적으로 자리 잡은 TV, 출연자들이 반복하는 본보기 사건, 낯섦을 거부하고 동일한 것에 익숙해지려는 동일시 심리에 따라 TV를 현실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특정 인간이나 사건을 스펙터클로 반복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통해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로 오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책의 초점은 TV가 현실 조작의 마왕이라고 지적하는 데 있지 않고, 그런 문제를 알면서도 시청자 제작자 출연자들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빨려 들어가는 메커니즘을 파헤치는 데 있다.

저자는 이들이 동물원이 아니라 야생 상태(고유의 본성)로 돌아갈 수 있는 윤리적 자각을 일깨운 뒤 동일시 또는 획일화된 TV의 얼굴을 해체하기 위한 방법으로 ‘거리 두기’를 제안한다. 다른 것들을 모두 닮은꼴로 환원시키는 TV의 가공할 만한 위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장 TV와 거리를 두라고 권한다. 원제 ‘L’ ´ECRAN ET LE ZOO’(2002년).

허엽 기자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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