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풍경]어느 번역자의 잠적

  • 입력 2007년 8월 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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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번역자가 번역을 하다 말고 어디론가 잠적하다니, 출간 예정일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A 출판사 대표는 최근 번역자 Y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번역자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다. 알 만한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 봤지만 허사였다. 이틀 동안 이런저런 정보를 취합해 본 결과, 번역자의 잠적이었다.

번역 원고가 들어오기만 고대하고 있던 A 출판사 대표에겐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Y 씨의 집으로 내용증명을 보내 놓을까, 아니면 번역자를 바꿔야 할까, 바꾼다면 계약금도 돌려받아야 하는데, 출판사 대표는 요즘 고민에 빠졌다.

B, C 출판사에도 불똥이 튀었다. Y 씨 번역서의 출간이 임박해 그의 ‘역자 후기’ 원고를 받아야 하는데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 출판사는 번역자가 다시 나타나기까지 한없이 기다릴 수도 없고, 그래서 여차하면 ‘역자 후기’ 없이 번역서를 낼 생각이다.

D 출판사의 대표는 2002년 말, 번역을 맡겼는데 아직까지 원고가 넘어오지 않았다. 참을 만큼 참았지만 번역 원고는 들어오지 않고 저작권자(외국 출판사)와의 계약기간 5년은 다 되어 간다.

자칫 번역서가 나오기도 전에 저작권자와 계약을 다시 해야 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저작권자가 재계약을 하지 않고 출판사를 바꿔 버릴 수도 있다.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D 출판사 대표는 번역자를 바꾸었다.

출판계에서 번역자가 잠적하거나 원고를 펑크 내는 사례가 종종 있다. 전문 번역가의 경우, 번역으로 생활해야 하다 보니 번역물을 많이 맡게 되고, 많이 맡다 보니 시간이 부족해 원고를 펑크 내는 것이다. 심리적인 부담 때문에 어느 순간 ‘모든 것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숨어 버리곤 한다.

번역은 힘겨운 작업이다. 어쩌면 우리말로 직접 원고를 쓰는 것보다 더 어렵다.

외국어의 바다 속에서 외국어와 씨름한다는 것은 때론 지루하고 때론 외로운 일이다. 그렇다 보니 불현듯 잠적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 같다.

좋은 번역을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중간 중간 번역자가 부담 없이 편히 쉴 시간도 필요하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한다.

A 출판사 대표를 더욱 화나게 한 것은 번역자가 한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정말로 힘들다면 출판사 측과 상의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았을까.

한 출판사 주간의 말.

“흔히 ‘아, 예. 다 되어 갑니다’라고 말하지만 겨우 머리말 정도 번역해 놓고 그렇게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어기는 사람들은 오래 못 가죠. 블랙리스트에 올라가면 어느 출판사가 번역을 맡기겠습니까?”

약속을 어기면 결국 자기 손해라는 말이다.

A 출판사 대표는 번역자를 바꾸는 쪽으로 마음을 굳혀 가고 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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