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新천재론]<12>청소년문학상 휩쓴 전아리 씨

  • 입력 2007년 6월 6일 03시 00분


코멘트
읽고 또 읽었더니 어느 날 이야기가 쓰고 싶어지더라는 전아리 씨. 그는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얼굴에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면서 “그것들을 소설로 쓰는 건 즐거운 일”이라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읽고 또 읽었더니 어느 날 이야기가 쓰고 싶어지더라는 전아리 씨. 그는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얼굴에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면서 “그것들을 소설로 쓰는 건 즐거운 일”이라고 말했다. 박영대 기자
전아리(21) 씨가 한글을 깨친 것은 유치원에 들어갈 즈음인 여섯 살 때였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빠르지도 늦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 그림일기도 ‘곧잘 쓰긴 하지만 보통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 전 씨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직접 썼다면서 ‘섬’이라는 이야기를 불쑥 보여 줬을 때, 부모는 깜짝 놀랐다. 여자아이가 상상의 섬들을 여행하는 내용이었다. 인간성을 재는 자가 있는 섬,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냉동해서 늘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섬…. 발랄한 상상력도, 애잔한 분위기도 있는 얘기를 초등학생 딸이 만들어 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부모는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 “사람들 얼굴만 봐도 이야기가 솟는다”

문학 청소년들의 정보공유 사이트로 유명한 ‘엽서시’(www.ilovecontest.com/munhak)에서 ‘전아리’만 치면 작품과 댓글이 좌르륵 뜬다. 전 씨는 대학생(연세대 인문학부 2년)이 됐지만 그의 이름과 소설은 청소년들에게 여전히 ‘전설적’이다. 문학사상사 청소년문학상 대상, 푸른작가 청소년문학상, 대산청소년문학상 금상, 최명희청년문학상…. 중고교 재학 시절 웬만한 문학상은 죄다 휩쓸면서 문학 청소년들 사이에서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란 말까지 나왔다.

문학 특기생들이 대학 진학 후 붓을 꺾는 경우가 적잖지만, 전 씨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창작을 이어 갔다. 그는 올해 들어 청소년문예지 ‘풋’에 장편 ‘시계탑’ 연재를 시작했다. 김영하 김연수 조경란 씨 등 젊은 작가들을 발굴한 문학동네 출판사는 등단도 하지 않은 이 학생과 단편집 한 권, 장편 한 권을 계약했다. 등단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보수적인 문학 출판사에서 미등단 신인과 계약을 한 것은 파격적이다. “그간 써 온 작품들을 검토한 뒤, 굳이 등단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프로 작가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조연주 문학동네 문학팀장은 말한다.

소설의 소재를 어디서 얻느냐고 물었더니 전 씨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예를 들면… 전철에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 얼굴을 보고 있으면 이야기가 생각나요.” 막연한 얘기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어디에서 나온 걸까?

○ “읽다 보니 쓰고 싶어졌다”

전 씨가 기억도 못하는 아기 적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것은 ‘책 읽는 소리’다. 뭐가 되겠다고 하든지 독서는 기본이라는 게 전 씨 부모의 신념이었다. 기어 다니는 아이 옆에 책을 갖다 놓았고, 접든 찢든 책을 늘 가까이 두었다. 아침저녁으로 네댓 권씩, 큰 소리로 구연(口演)해서 읽어 줬다. 딸은 언제부턴가 장난감보다 책을 더 좋아하게 됐다.

그렇지만 전 씨가 또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어머니 문희련(48) 씨는 어느 날 흥미로운 발견을 한다. “네댓 살 무렵인가, ‘재크와 콩나무’를 읽어 주는데 ‘거인이 나타났어요’라고 하니까, ‘엄마, 거인이 쿵쿵 발소리를 내면서 나타난 거야’라고 하는 거예요.” 묻지도 않았는데 어린아이가 창의적으로 묘사를 더했다. “그동안 읽어 준 책들 어딘가에서 떠오른 것 같다”고 어머니는 말한다. 독서를 하다 보니 표현 묘사 능력을 터득한 것이다.

실제로 전 씨 가족의 독서량은 엄청나다. 가족의 주요 행사는 ‘책 쇼핑’. 함께 서점에 가서는 각자 흩어져서 보고 싶은 책을 고른다. 계산대에서 다시 만난 식구들의 손에는 책이 한두 권도 아니고, 저마다 10권씩은 들려 있다.

책을 읽다 보니 전 씨는 자기도 직접 얘기를 쓰고 싶어졌다. 열한 살 때 처음 보육원을 배경으로 한 동화를 써봤는데, “쓰는 게 읽는 것보다 재미있었다”. 아버지 전명열(51) 씨에게 동화를 보였더니 후한 칭찬을 받았다. 아버지는 말했다. “아리가 상상력이 뛰어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림책에서 잠깐 본 장면을 갖고서도 상상의 날개를 펼치더군요. 북돋아 줘야겠다는 생각에 문장을 구체적으로 짚어 주면서 칭찬해 줬더니 아이가 좋아했습니다.”

실제로 전 씨도 “그때 아빠의 칭찬을 듣고 신이 나서 계속 써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성장하면서 동화에서 소설로 넘어가는 건 자연스러웠다. 작품은 한편 한편 쌓였고, “평가를 받아 보고 싶다는 생각에” 문학상에 지원한 게 잇달아 수상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전 씨는 출판사 3곳에 만화 스토리 원고를 보냈고, 한 출판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전화로 몇 살이냐고 묻기에 ‘30대는 아니고요’라고 어물어물했지요, 뭐.” 장난스럽게 웃는 전 씨. 중학생 신분임을 나중에 알게 된 출판사는 깜짝 놀랐지만, 책으로 나오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네모난 얼굴 가족과 옆집 둥근 얼굴 가족이 티격태격 다투다가 정이 든다는 만화 ‘네모네 가족’이었다.

문학사상사 청소년문학상 심사를 맡았던 최혜실 경희대 교수는 전 씨의 작품을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문장력이 뛰어났고 묘사가 집요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주목했던 건 창의적인 상상력이었다.” 당시 수상작 ‘강신무’는 내림무당을 홀어머니로 둔 아들의 아픔을 그린 단편으로, 전통찻집에서 선배와 국화차를 마시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라고 한다.

○ “읽고 쓰고 읽고 쓰고”

어려웠던 때도 있었다. 문학상 하면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전 씨였지만 대학에서 주최하는 고교생 문예백일장에서는 장려상 한 번 타질 못했다. 대부분의 문예백일장 장르는 원고지 15장 정도 분량의 콩트다. “발단 쓰고 나면 분량을 다 채우는 거예요.” 학원에 다니면서 ‘공식’에 맞춰 훈련하는 문학 특기생 지원자들과 달리 독서가 쌓이면서 글쓰기를 터득한 전 씨는 ‘콩트 공식’에 영 몸을 맞출 수가 없었다. 한참 애를 먹었지만 쓰는 걸 그만두진 않았다. “그래도 쓰는 게 좋더라고요.” ‘읽고 쓰고 읽고 쓰고’를 반복하던 전 씨는 한양대 주최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

전 씨는 매일 밤 원고지 10∼15장씩, 두 시간씩 소설을 쓴다. “고교 때 파김치가 돼서 와도 글을 썼어요. 안 쓰면 소화가 안 된다고 하더군요.” 아버지의 말이다. 대산문화재단의 소개로 전 씨의 작품을 읽어 본 소설가 신경숙 씨는 “젊은이들이 대개 가볍고 감각적인 데 치우친 소설을 쓰는데 전 씨의 작품은 문제의식이 진지한 게 좋았다”면서 “문단에 나오면 활발하게 활동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전아리는

△생년월일 1986년 5월 31일 △취미 독서, 영화감상 △출신교 신답초교-동대문여중-이화여고-한양대 국문과 중퇴-연세대 인문학부 2학년 재학 중 △가족사항 전명열 문희련 씨의 2녀 중 맏딸 △첫 창작 열한 살 때 동화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씀 △주요 입상경력 문학사상사 청소년문학상 중등부 대상, 문학사상사 청소년문학상 특별대상, 푸른작가 청소년문학상, 정지용청소년문학상, 최명희청년문학상, 기독교청소년문학상, 불표청소년문학상, 대산청소년문학상 금상, 천마문학상, 계명문화상, 연세문화상 등

▼“쉬운 글들로 많은 사람과 통하고 싶어”▼

요즘 전아리 씨는 고민 중이다. ‘누구를 위한 소설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빠져 있는 것. 최근 한국 소설이 독자와 소통하기보다 폐쇄적이라는 지적을 받는 터다. 전 씨는 “창작자 자신과 소수의 독자를 위한 난해한 소설을 쓰느냐, 대중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쓰느냐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 있으며, 마음은 더 많은 사람을 위한 소설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가 가장 많이 귀를 기울이는 독자는 고교 1학년 동생이다. 작품을 쓰고 나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합평회’를 하는데, 아리 씨는 특히 동생 아영 양의 지적을 많이 담아둔다. 청소년문예지 ‘풋’에 장편 ‘시계탑’을 연재하는 전 씨는 제2회 연재분을 가족에게 선보였을 때 동생에게 “변화가 약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제1회에 비해 이야기가 극적이지 않다는 지적이었다. 동생의 ‘비평’에 전 씨는 3주 가까이 힘들여 쓴 원고를 버리고 닷새 만에 원고를 고쳐 써서 보여줬다. 동생은 “급하게 쓴 것 같긴 하지만 훨씬 낫다”고 말해 주었다.

전 씨가 이렇게 동생의 의견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자기만의 언어에 빠져 있지 않고 또래 독자들의 공감을 얻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소설은 결국 자신이 속한 시대의 사람들 이야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황석영 성석제 씨 등 이야기를 잘 풀어 가는 작가를 좋아한다는 전 씨는 “서사 위주의 장편 쓰기를 계속 훈련할 것”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등단 시스템에 도전할 것인지 묻자 그는 “신춘문예든 문예지 신인상이든 응모해 볼 참이지만 등단이 목표는 아니며 중요한 것은 소설을 계속 써 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