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전쟁… 그들의 5월도 푸르렀을까

  • 입력 2007년 5월 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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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결혼했고 5월에 딸을 얻어 5월이 더없이 의미 있다는 고은(74) 시인.

그러나 “소파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로서의 5월은 내 어린 세월 어디에도 없다”고 한다.

혹독하게 굶주려서다.

어찌나 가난했던지 논두렁 둑새풀로 죽을 쑤어 먹고 냉이와 나물로 하루하루를 넘겼다.

“5월 5일 축복의 시간에도 어린 시절의 나처럼 어린이날이 없는 수많은 어린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이날을 앞두고 ‘현대문학’ 5월호는 문인 14명의 어릴 적 기억을 담은 에세이 모음을 실었다.》

천진하기도, 그래서 크게 상처받기도 한 유년의 추억은 문인들의 내면세계를 구축한 근원인 만큼 맛깔스럽게 읽히면서도 속 깊은 의미가 있다.

소설가 박완서(76) 씨는 갈 수 없는 북녘 고향 개성의 추억을 되새긴다. 어느 날 박 씨는 동향인 K 화백과 머리를 맞대고 개성 지방만의 특별한 욕이 무언지 생각해 본다. 문득 떠오른 게 ‘야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다. 그 욕이 얼마나 흔했는지 개성 아이치고 야다리 밑에서 주워오지 않은 아이가 없을 정도였는데, 그래도 그 소리를 들을 때 서러워 울고불고하던 기억이 또렷하다.

태평양전쟁 때다. 공습경보가 울리자 어머니는 어린 김지하(66) 시인을 업었다. 아이의 목에다 띠를 둘러 잔뜩 조이고는 허둥지둥 나온 어머니. 한참 뒤 해제 사이렌이 울렸을 때 어머니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나 밥 어떻게 먹어?” 김 씨는 두고두고 어른들에게 “이 미련한 놈아! 그렇게 목이 졸려 있으면 숨이 막힐 텐데 죽는 건 걱정이 안 되고 밥걱정만 되냐?”는 말을 들었다면서, “그러나 민중에겐 밥이 하늘인 법”이라고 익살스럽게 덧붙인다.

소설가 전상국(67) 씨는 도둑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다. 아이들은 잡화상에 가서 물건을 훔쳐오는 놀이를 했다. 전 씨는 진열대 물건 하나를 손에 꽉 움켜쥐고는 냅다 뛴다. 친구가 뭔지 보자고 했을 때에야 겨우 손을 폈다. 들고 온 물감 봉지는 일찌감치 터져 손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작가의 담담한 묘사를 통해 어린아이의 콩닥거리는 마음이 생생하게 전해 온다.

동네 잔칫집에 일손으로 나선 남덕이 엄마는 자기 자식한테만 부침개를 챙겨 줘 함께 있던 소설가 구효서(49) 씨를 서운하게 했다. 시인 함성호(44) 씨는 오징어 서리를 하다가 오징어가 널린 줄에 입이 걸려 마찰열로 화상을 입어 얼굴이 피에로처럼 됐다. 어린이날 직지사에 간 소설가 김연수(37) 씨는 미터기 요금으로 가자며 아버지가 택시운전사와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걸어서 집에 가기로 한다. 세 시간을 걸어서 집에 온 그날은 잊지 못할 어린이날이었다.

작가들의 어린 시절 모습은 우습고도 애틋하다.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그 마음은 오늘의 어린이들과 다르지 않다. 유년기가 인생에서 가장 진실하고 순수한 시기임을 작가들은 따뜻한 기억을 통해 일깨워 준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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