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조정구]도시의 정취를 지우지 말자

  • 입력 2007년 4월 1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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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을 답사한다. 답사라고 하면 어떤 주제를 가지고 특정 대상이나 지역을 둘러보는 것인데, 이 답사는 조금 특이하다. 찬찬히 ‘이어 보는’ 답사다. 종로와 청계천을 따라 크고 작은 길과 골목 하나하나를 빼놓지 않고 들여다보고 고유한 풍경은 어떠한지,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땅과 건물을 관찰하다가 거기에 살고 있는 분과 얘기를 나누고, 때로는 건물이나 공간을 실측하면서 서울을 있는 그대로 보고 기록한다.

어느덧 330회를 넘어섰다. 정말로 많은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이 새로웠다. 참 아름다워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옥인동, 서울 구도심만큼이나 오랜 삶의 역사를 지닌 왕십리, 끝없이 펼쳐지는 시장, 낙산자락 계단과 골목, 고만고만한 건물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는 이화동.

더 안으로 들어가면 세운상가 아래편에 실핏줄처럼 얽힌 골목에 붙어 아는 사람만 찾아가는 간판 없는 식당, 왕십리길 안쪽 네 벽만 남은 오래된 공장 터에 17가구가 모여 사는 공장 속 작은 집들, 작은 골목을 아름다운 화초로 가득 채워 놓은 골목의 정원사 사장님 등 셀 수 없이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모두가 우리 도시의 오랜 역사와 사람들의 활기찬 삶이 만나 이뤄 낸 것들이다. 조금은 허름하고 어설퍼도 이런 것들이 서울의 고유하고 소중한 자산이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많은 것이 사라져 간다. 100채 가까이 되는 사직동 한옥 동네가 송두리째 사라져 겨우 몇 동의 아파트로 올라갔다. 도도한 옛 모습을 간직했던 스카라극장은 어느 날 불시에 철거됐다. 청계천 변 삼일아파트는 아무 관심도 끌지 못한 채 상가를 남겨 두고 사라졌다. 순라길의 크기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던 종묘 뒤편의 골목과 집들도 부서져, 넓고 휑한 가로공원이 들어섰다. 난데없이 등장한 뉴타운 사업은 ‘아직 살 만한’ 도심의 오랜 주거지를 가게와 세입자가 떠난 삭막하고 허전한 풍경으로 만들었다.

가지고 있던 것의 의미와 가치를 얘기할 시간도 없이, 우리 도시는 너무도 쉽게 부서지고 지워졌다. 앞으로의 도시 계획도 그러한 방향을 예견하고 있다. 세운상가 주변은 처음 들어간 사람에겐 당황스럽고 어지러운 공간이지만 찬찬히 둘러보면 예로부터 내려오는 하천과 길, 골목과 땅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직도 2층 한옥을 포함한 많은 한옥이 그곳에 서 있다. 겉으로 보는 건물의 노후화와는 달리 귀금속, 전자, 조명, 철재가공, 건설자재 등 모든 공간이 비워진 곳 하나 없이 다양한 삶의 모습으로 생생히 채워져 거대한 도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곳 세운상가 주변 블록의 국제현상설계 결과를 보면 서울이 고유한 정체성을 점점 더 잃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현대적 빌딩들이 도시 역사와 삶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당당히 종묘를 굽어보는 기이한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

도시를 지우지 않고 시대에 맞도록 잘 만들어 가는 방법이 필요하다. 그것은 가까운 곳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다. 세운상가 바로 옆 인사동과 북촌이 그 예다. 두 지역이 21세기 들어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은 단순한 사회문화 현상이 아니다. ‘인사동 지구단위 계획’과 ‘북촌 마을 가꾸기 사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은 커다란 역사 자생의 터다. 답사를 하면서 가끔씩 전기가 통하듯 어떤 풍경과 조우하며 멈춰 설 때가 있다. 그리고 천천히 옛 지적도와 지금의 지적도를 겹쳐 본다. 앞으로 펼쳐진 굽은 길에 보이지 않던 개울이 나타나 흐르고, 눈앞에 선 나무 아래로 하얀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바삐 지나간다. 조상들이 다니며 보던 풍경, 우리 후손들에게도 이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조정구 건축가 구가도시건축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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