볍씨는 품고 있다 3500년전 비밀을…

  • 입력 2007년 4월 11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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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상차 현미경으로 본 강아지풀(왼쪽)과 귀리의 꽃가루. 꽃가루 안 흑점의 분포 모습이 사람의 지문처럼 저마다 다르다. 이 차이를 이용해 과거 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다. 사진 제공 최기룡 교수
위상차 현미경으로 본 강아지풀(왼쪽)과 귀리의 꽃가루. 꽃가루 안 흑점의 분포 모습이 사람의 지문처럼 저마다 다르다. 이 차이를 이용해 과거 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다. 사진 제공 최기룡 교수
《최근 강원 양양군 오산리 신석기 습지유적에서 출토된 식물에서 싹이 돋아나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았다(5일자 A15면 참조). 하지만 과학적 검증 없이 싹을 틔운 사실만 강조해 고고학의 본질을 왜곡했다는 지적이 많다. 이 식물이 고고학적 가치를 얻으려면 다음 물음에 답해야 한다. ‘퇴적환경과 식생(植生)으로 볼 때 7000년 전에 이 식물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당시 생태계와 인간생활 연구에 어떤 실마리를 줄까. 문제는 이 물음에 명쾌한 답을 줄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 그동안 고고학계가 인공 유물 발굴에 치중한 탓에 식물 종자와 뿌리, 꽃가루 연구에는 관심이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 씨앗-꽃가루도 유물… 고고학계 ‘식물고고학’ 관심 고조

전문가들은 식물고고학이야말로 기존 고고학이 설명하지 못했던 농경의 기원과 경작 방식의 변화, 사회구조와 상징체계, 기후와 생태계 모습까지 실증해 낼 열쇠라고 입을 모은다.

○전남 무안 습지식물 씨앗, 2000년 전도 논농사 방증

식물고고학은 종자, 뿌리 같은 식물 유체 연구와 꽃가루 연구로 나뉜다. 전자가 주로 인간의 경제, 문화를 밝히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면 후자는 시대별 기후와 생태계 변화를 재구성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간의 연구는 벼농사의 기원을 밝히는 데 한정돼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연구의 핵심은 다양한 식물 종자의 형태와 크기를 분류하고 통계화해 인간이 어떻게 야생식물을 이용했고 작물로 변화시켰는지 밝혀내는 것이다.

전남 무안군 양장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은 볍씨만이 아니었다. 무수한 잡초 종자가 함께 나왔다. 농촌진흥청 작물과학원 박태식 연구관이 분석해 보니 모두 습지식물이었다. 이는 2000년 전에도 화전이나 밭이 아니라 논에 물을 대 벼농사를 지었다는 결정적 증거다. 그는 현재 식물과 비교해 기후와 식생이 2000년간 크게 변하지 않은 것까지 확인했다.

경남 진주시 남강댐 수몰지구 유적에서는 쌀 밀 보리 콩 팥 들깨의 탄화 씨앗이 나왔다. 이처럼 다작물을 경작하려면 1년 내내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게 이경아 서울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의 설명이다. 3500년 전인 청동기 전기에 이미 농경사회가 정착됐다는 의미다.

그가 참여한 중국 허난 성, 산둥 성 유적 연구는 신석기 후기부터 하왕조 시대의 사회상까지 밝혀냈다. 쌀은 지배층 주거지에만 있었고 머루류와 함께 발효된 흔적으로 발견됐다. 이는 쌀이 서민의 주식보다는 지배계급이 선호한 고급술의 원료로 사용됐음을 보여 준다.

○전북 익산 꽃가루-삼국사기 ‘미륵사 홍수’ 증명

꽃가루로 확인되는 역사도 흥미롭다. 최기룡 울산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전북 익산시 미륵사 유적의 퇴적물에서 꽃가루를 추출해 분석한 결과 미륵사 뒷산 계곡의 식생과 일치하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홍수로 계곡물이 미륵사 주변을 덮쳤다는 증거다. 삼국사기에는 미륵사에 벼락이 치고 큰비가 내려 산이 무너졌다는 기록이 있다. 꽃가루가 문헌을 실증한 셈이다.

그는 퇴적층별 꽃가루를 연속적으로 연구해 한반도 남부가 1만2000년 전에서 8000년 전까지 추운 기후인 아한대 식생을 보이다가 8000년 전부터 급격히 따뜻해져 4000년 전에는 벼농사에 적합한 기후였다는 것까지 밝혀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여러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 종자와 꽃가루는 대부분 그냥 버려진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안승모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고고학 발전을 위해서라도 식물고고학 전문 연구기관이 늘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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