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속의 별]최태지 정동극장장의 ‘프리마돈나’ 안숙선 명창

  • 입력 2007년 2월 1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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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사진작가 이진환 씨
사진 제공 사진작가 이진환 씨
안숙선 명창의 집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안 명창(왼쪽)과 최태지 정동극장장. 사진 제공 정동극장
안숙선 명창의 집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안 명창(왼쪽)과 최태지 정동극장장. 사진 제공 정동극장
쪽 찐 머리 너머 보름달이 뜨니

구성진 소리로 춘향-몽룡 불러내어…

“그냥 동네 어른들 모셔 놓고 밥이나 한 끼 먹으려고 하는 거니까 시간 되면 와.”

몇 주 전 안숙선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선생님의 자택 연습실에서 이웃 주민과 독거노인을 초청해 딸과 제자들의 거문고 산조와 가야금 병창을 들으면서 식사를 하는 자리를 마련하셨단다. 이사 와서 이웃에게 정식으로 인사도 못했고, 또 늘 소리쳐 연습하니 죄송한 마음도 들고 해서 조촐하게 마련한 자리라고 하셨다. 작년 겨울 선생님께서 손수 지어 주신 정갈한 밥상을 받은 적이 있는 터라 이내 구미가 당겼다.

“꼭 갈게요, 선생님” 하고 대답했지만 예정된 공연에 환한 미소로 이웃을 맞이하는 선생님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모친상을 당해 소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이하시는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장한 어머니 상을 받았던 어머니가 생각 나” 하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선생님과의 추억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7년 국립발레단의 단원으로 입단하기 전까지 일본에서 살았던 나는 한국무용이나 기악은 알았지만 창극이나 판소리는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했다. 국립극장 내에 각 예술 산하단체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틈틈이 창극단 공연을 보러 갔고, 특히 안 선생님의 판소리 공연은 빼놓지 않고 보았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시원시원한 소리….

그때는 한국말을 잘 몰랐는데도 선생님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신명이 나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씩 외국인들이 우리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난 쉽게 공감이 간다. 판소리에 능하신 것 외에도 선생님은 뛰어난 연기력과 재치 있는 표정을 가진 이른바 창극계의 ‘프리마돈나’이셨다. 별주부전의 ‘토끼’부터 ‘심청’ ‘춘향’까지, 선생님의 익살스러운 모습부터 처연한 모습까지 지켜보며 난 실컷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선생님의 소리를 듣기 전까지 사실 난 모든 예술 장르 중에 발레가 가장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발레는 발끝부터 손끝까지 어느 곳 하나 긴장을 늦출 수 없지만, 목만 사용하는 노래는 상대적으로 좀 쉽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안 선생님의 공연을 보면서 소리는 목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닌 온몸의 모든 근육과 감정을 집중시켜 끌어내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판소리를 하면서 보여 주는 선생님의 ‘발림’(가락이나 사설의 내용에 따라 손발, 온몸을 움직여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은 훌륭한 무용이라는 느낌도 든다.

외국인들은 가사는 몰라도 선생님의 표정과 몸짓만 보고도 심청이 나오는 장면인지 심봉사 대목인지 다 알아듣는다고 한다. 발레의 동작이 치밀한 연습에 의해 준비된 것이라면 판소리의 몸짓은 고조된 감정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몸의 이끌림이다. 발로 치맛자락을 살짝 차올릴 때 보이는 버선코, 땅을 향해 살짝 구부러진 손끝 하나하나는 어떤 발레 동작보다 아름답다. 또한 선생님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무대를 호령하듯 부채를 쫙 펴실 때에는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그럴 때면 “나도 발레 ‘돈키호테’를 할 때 부채를 잘 폈는데, 선생님과 나는 공통점이 많아” 하며 속으로 웃기도 한다.

올해는 선생님의 무대 데뷔 50주년이 되는 해다. 긴 세월 동안 항상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 소리의 맥을 이어가는 선생님을 보면 존경과 동시에 부러움이 생긴다. 나 역시 딸아이 둘을 낳고서도 발레리나로 활동했지만, 선생님처럼 여전히 자신이 사랑하는 예술 안에 몸담고 있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자신의 무대를 준비하고 제자들을 산에 데려가 같이 연습하시는 모습을 보면 그 철저함에 늘 고개가 숙여진다.

어머니를 보내시고 혹 허전하시지 않을까 하여 전화를 드렸다. 매번 선생님과 통화를 할 때 느끼는 것이지만, 목소리가 너무 작아 집중을 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다. 전엔 어디 몸이 안 좋으신가 했는데 평소에 작은 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은 목을 보호하기 위한 철저한 자기관리의 습관이다. 선생님은 명창으로 불린 지 오래됐지만 요즘도 설거지를 하면서 목을 풀고, 운전을 하거나 시간이 날 때마다 중얼중얼 사설을 외우신다. 공연이 임박해 있지 않더라도 일상을 리허설처럼 여기고 항상 노래와 무대를 준비하시는 것이다.

얼마 전 선생님 댁을 방문했을 때 집안 곳곳에 놓인 옹기를 보면서 선생님이 옹기를 참 많이 닮으셨다고 느꼈다. 단정하게 쪽 찐 머리를 하시면 드러나는 윤기 나는 이마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옹기를 닮았다. 늘 단정하고 순수한 선생님의 자태도 소박한 듯하면서 유려한 옹기의 선을 닮은 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는 집 안의 작은 무대 공간을 ‘수류화개(水流花開)’라고 이름 지으셨다. 물이 흐르고 꽃이 만개하듯 그 공간이 국악 발전에 기여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붙인 이름이라 한다. 지난 50년간 선생님의 발자취가 바로 우리 소리 보전과 발전에 물꼬를 트고 싹을 틔워 온 과정이 아니었을까.

최태지 정동극장장

■ 판소리와 발레의 크로스오버

“유럽 공연을 갔을 때 서양의 발레를 자주 접했어요. 1987년 최태지 씨가 국립발레단에 입단했을 때 우리 발레계에도 제대로 된 스타가 한 명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명창 안숙선(58) 씨는 20년 전 최태지 정동극장장을 처음 봤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일본 교토(京都) 출생인 최 극장장은 일본 가이타니 발레학교, 프랑스 프랑케티발레학원, 미국 조프리발레학교, 미국 뉴욕발레단 등에서 연수를 마치고 국립발레단에 프리마돈나로 입단했다. 최 극장장은 “나도 선생님의 판소리 공연에 빠져들었고, 선생님도 내 발레 공연에 자주 오셨다”며 “두 사람은 장르는 다르지만 서로의 팬이 됐다”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발레가 대중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죠. 그런데 최 씨가 오면서부터 발레의 관람객 수도 많아지고 발레의 붐이 일게 됐어요. 당시 프리마돈나 최 씨를 생각할 때 ‘발레에 최태지가 있다면 국악에 안숙선이 있다. 프리마돈나에게 내가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안숙선)

안 씨는 “최태지 씨는 일본에서 체계적으로 발레를 전수받은 프로 발레리나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며 “우리 창극단도 프로들의 세계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안숙선 명창은 아홉 살의 나이로 이모(강순영 명인)의 손에 이끌려 국악을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판소리, 무용, 타악 등 다양한 전통문화를 배웠던 안 명창은 서울로 올라와 김소희, 박귀희 명창에게서 소리와 가야금 병창을 배웠고 19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했다. 이후 그는 성우향, 박봉술, 정광수 등의 대가들을 만나며 판소리 다섯 마당을 모두 전수받았다.

안 명창은 국립창극단에서 평단원에서 예술감독 자리까지 올랐고, 현재는 원로단원으로 창극단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는 안 명창은 동아일보 주최로 판소리 완창 발표회를 갖는 등 여러 차례 기념공연을 펼칠 계획이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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