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는 책의 향기]파무크 소설 속 도시묘사 입체감 느껴졌네

  • 입력 2007년 1월 13일 02시 57분


코멘트
From:서현 한양대 교수

To:건축을 꿈꾸는 젊은이들

도시냐 벌레냐. 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는 이것부터 궁금했다. ‘파리대왕’. 1983년 윌리엄 골딩에게 노벨상을 안겨준 소설은 제목부터 기이했다. 노벨상을 받는 소설은 어떤 걸까 하는 궁금증도 있었다.

소설은 충격이었다. 얼개는 어렸을 적 보았던 ‘15소년 표류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음험하고 비열했다. 책의 날개에 적힌 문장은 아직도 선연하다. 인류의 미래에 대한 비극적 세계관. 소설은 글재주가 아니라 세계관의 표현이라는 데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가 읽은 이전의 소설들과 달랐다. 내가 세상을 이렇게 본다는 뚜렷한 목소리였다. 관점에 동의하고 않고는 다른 문제였다.

인류의 미래는 몰라도 캠퍼스의 미래는 분명 동굴같이 어두운 시대였다. 매운 연기와 목쉰 구호가 가득했다. 분노와 좌절감 없이 학교를 다니는 것은 어려웠다. 내게 소설은 탈출이고 해방이었다. 소설은 읽고 소설책은 베고 덮고 깔면서 살았다.

‘파리대왕’ 이후 나는 방안 여기저기 던져 놓았던 우리의 겸허한 모국어 소설책들을 줄줄이 다시 불러냈다. 세상을 이렇게 본다고 뚜렷이 이야기하는 소설은 좀 더 뒤에 내게 다가왔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중요한 것은 소설가가 세상을 보는 방향이 아니었다. 세상을 보는 눈 자체였다. 그 시절 대학을 다닌 이로 그의 소설들을 그냥 지나칠 수 있던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고 덩달아 소설도 심드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애첩문학이 득세한다고도 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아니고 바람난 남녀와 벗은 몸들이 등장했다. 나는 아줌마 문학이라고 불렀고 소설은 내게 술안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내가 소설을 재단하고 소설가들을 비난할 수 있는 것은 인세를 지불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논리였다.

이제는 소설도 도시와 함께 머리에 남는다. 대학시절 소설의 도시는 눈 덮인 도시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雪國)’은 내게는 삿포로였다. 기차가 터널을 벗어나자 창밖은 온통 눈나라였다는 바로 그곳이 내게는 웬일인지 니가타가 아닌 삿포로여야 할 것만 같다. 지금도 겨울이면 이 긴 터널을 벗어나 눈 덮인 삿포로에 가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르한 파무크의 ‘내 이름은 빨강’은 소설로 쓴 이스탄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목이 기이한 것은 이것도 마찬가지다. 사람이냐 색연필이냐. 죽어 우물에 누워 있는 자의 독백이라는 소설의 도입은 허를 찌른다. 소설 속의 도시공간은 치밀하고 구체적이다. 서술구조는 건축적이라고 할 만큼 입체적이다. 2006년의 노벨상은 언어로 도시를 쌓아 올린 작가에게 수여한 모양이다.

건축가의 자질이 뭐냐는 질문을 건축가 지망 고등학생, 혹은 그 부모들에게서 가끔 받는다. 그림을 잘 그려야 하느냐, 인맥이 넓어야 하느냐, 혹은 체력이 좋아야 하느냐. 내가 내미는 답은 상상력과 설득력이다.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그려내고 그걸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 건축가의 기본 소양이다. 아니 모든 이에게 필요한 소양이다. 이를 키우는 가장 훌륭한 길이 소설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력을 보니 오르한 파무크는 이스탄불대 건축과 출신이다. 그는 건축가의 길을 걸었어도 훌륭한 성과를 얻었을 것이다. 건축 교육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담는다. 건축 교육은 벽돌 쌓는 지식을 넘어 자신의 세계관을 요구한다. 건축이 아름다운 것은 도시와 역사를 다루는 작업이고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건축가는 인세를 내지 않은 시민들의 비난도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