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 뜯는 전화상담원 “노래하기엔 24시간도 짧죠”

  • 입력 2007년 1월 7일 19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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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 소니비엠지
사진 제공 소니비엠지
보증금 200만 원, 15만 원짜리 서울 홍대 앞 비좁은 월세방의 아침은 분주하다. 그러나 스물여덟 살의 그녀는 오늘도 웃으며 출근한다. “잠만 잘 수 있으면 되지 뭐….” 2호선 강남역행 전동차에 몸을 실었다. 전날 밤 공연 때문에 잠이 쏟아지지만 참을 수 있다. 그래도 참기 힘들면 체력 좋다며 친구가 붙여 준 별명 ‘줄리아 로봇(줄리아 로버츠+로봇)’을 떠올려본다.

오전 9시. “친절히 모시겠습니다. 상담원 정민아입니다”로 시작된 일상. 4년째 전화 상담원으로 일하는 그는 어릴 적 무용가를 꿈꿨으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오토바이에 다리를 다쳐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런 그가 가야금을 접한 것은 중학교 때. 호기심에 동네 교습소에 갔다 가야금과 민요를 배웠고 국악고와 한양대 국악과에 진학하기에 이르렀다.

“고3 때 ‘레드 핫 칠리 페퍼스’ 같은 록 밴드에 빠져서 그런지 자연스레 퓨전 음악을 연구했죠. 하지만 가야금 연주만 해 온 제가 실용음악을 알 리 없었죠. 졸업반이 됐지만 취직도 안 되고….”

가야금 연주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생계를 위해 선택한 것은 한 달 70만 원을 받는 홈쇼핑 전화 상담원. 이후 학원 동영상 강의에 대한 문의를 받는 일부터 인터넷 소액결제 문의까지 상담원의 생활이 이어졌다. “아가씨 목소리 예쁘다, 만나자”거나, “너랑 얘기하기 싫고 관리자 바꿔”라는 말을 밥 먹듯이 들어야 했다.

그러던 중 2004년 드디어 홍대 앞 한 갤러리에서 데뷔 무대에 설 기회가 생겼다. 10평 남짓한 공간에 울려 퍼진 그의 25줄 가야금 소리와 나른한 목소리는 록과 힙합 음악으로 가득 찬 공간에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이후 그를 찾는 클럽들이 생겨났고 그에겐 ‘홍대의 이단아’라는 별명이 붙었다.

“2005년 8월 7곡을 담은 미니 앨범을 딱 500장 만들었는데 다 팔렸어요. ‘스스로 만든 정민아 팬카페’라는 팬클럽도 생겼고….”

마침내 최근 데뷔 음반을 발표했다. 전래 민요를 노래한 ‘새야 새야’부터 보사노바로 편곡한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 가야금으로 재즈를 연주한 ‘럴러바이 오브 버드랜드’ 등은 ‘초짜’ ‘이단아’가 만든 음악이라 하기엔 수준급이다.

“가끔 주변에서 ‘앞으로도 전화 상담 계속할래?’라고 묻는데 24시간을 사는 지금 모습이 제겐 딱이에요. 10년 뒤에도 전화 상담을 하든 토스트를 굽든 전 밤만 되면 어딘가에서 가야금 줄 튕기며 노래할 거예요.”

당차고 시원시원한 그. 하지만 ‘시집’ 얘기를 꺼내자 “오우∼ 전 독신주의자예요”라며 손사래를 친다. 괴짜 전화 상담원, 아니 ‘줄리아 로봇’의 24시는 오늘도 ‘반짝반짝’ 빛나는 중이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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