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3년 초현실주의화가 미로 사망

  • 입력 2006년 1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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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2월 25일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후안 미로가 사망했다. 향년 90세.

유년기의 미로는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다. 고야,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같은 화가를 배출한 스페인의 예술적 정열을 타고 난 데다 보석상 부친과 가구상 조부에게서 손재주를 물려받은 터였다. 열네 살에 미술학교에 들어갔지만 딱딱한 학교 교육에 금세 지쳐 학업을 그만둔다. 아버지는 그런 그를 부기 계원으로 취직시킨다. 그러나 예술가가 운명인 젊은이가 부기 일을 감당할 리 만무하다. 미로는 성홍열에 신경쇠약이 겹쳐 집에서 쉬다가 열아홉 살에 사립 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에 들어선다.

미로가 처음부터 초현실주의로 방향을 잡았던 것은 아니다. 스물다섯 살에 연 첫 개인전에서는 야수파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1919년 프랑스 파리로 이사해 피카소와 만난 뒤에는 입체파의 분위기가 나는 그림도 그렸다. 시인 트리스탕 차라, 루이 아라공, 폴 엘뤼아르, 파리에 머물던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과 어울리면서 미로는 예술의 향취에 흠뻑 젖었다(헤밍웨이는 미로의 작품 ‘농장’을 구매해 평생 간직할 정도로 각별한 우정을 과시했다). 파리의 최신 유행 사조는 초현실주의였으며 미로도 자연스럽게 물들었다. 스물아홉 살에 고향 바르셀로나로 돌아왔을 때 그는 초현실주의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미로는 재기 넘치는 예술가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긍정적인 영향을 나누던 때에 활동했다. 그는 화가 막스 에른스트와 함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주도하던 ‘러시아 발레단’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의상과 무대장치를 디자인했다. 한편으로 당시 활발하게 활약하던 화가 파울 클레한테서도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 미로가 독자적인 화풍을 갖게 된 것은 당대의 뛰어난 예술가 동료들에게서도 힘입은 바 크다. 별, 여자, 새 등을 상형문자같이 그리고 조화시킨 화면은 개성적이고 유머러스하다.

개인적으로는 은둔자처럼 살았지만 예술적으로는 혁명가였다. 초현실주의의 창시자인 앙드레 브르통이 미로를 두고 ‘최고의 초현실주의자’라고 극찬할 정도로 생전의 그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미로 자신은 정작 어떤 ‘주의’에도 속하기를 거부했다. 정체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회화뿐 아니라 도예와 조각, 벽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고 말년에는 ‘기체(氣體) 조각’(기체를 이용한 조각)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실험하는 등 평생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삶을 살았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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