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첫 선거

  • 입력 2006년 12월 15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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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추진하기 위한 온 국민의 총의에 의한 국민적 조직체로서 조국통일의 신성한 사명을 가진 국민의 주권적 수임기관.’

1972년 11월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91.9%, 찬성률 91.5%로 확정된 이른바 ‘유신헌법’. 그 안에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이처럼 거창하게 규정돼 있다.

그럴 만했다. 유신헌법 조항만 보면. 그러나 법전 밖 현실은 암담했다.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토론 없이 무기명투표로 선거한다.’(39조 1항) 대통령을 뽑을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는 1972년 12월 15일 치러졌다.

경쟁률은 2.49 대 1. 그런데 아무런 선거 쟁점이 없었다. 야당 대통령 후보는 아예 없었다. 대의원 2359명 중 무투표 당선자가 225명(9.5%)이나 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1978년 제2대 대의원 선거 때도 사정은 비슷했다. 현역 대의원과 경쟁하던 신인 후보들은 거의 대부분 이렇게 외쳤다.

“저 사람은 6년이나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당선돼도 ‘그분’을 대통령으로 찍을 테니까 한번 바꿔 봅시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재적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자를 대통령당선자로 한다.’(39조 2항) 과반수의 지지만 필요했다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 후보의 8대 대선(1972년 12월) 득표율은 무려 99.9%. 이런 절대적 지지에는 ‘남북대화와 통일의 시대에 대처하려면 남한의 대통령도 북한의 김일성만큼이나 힘이 있어야 한다’는 정권의 논리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비민주적 투표 행태가 북한을 닮아간다”는 저항의 목소리도 커져갔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수의 국회의원을 선거한다.’(40조 1항) 하지만 그 후보자 전원을 대통령이 일괄 추천한다는 것….

‘김형욱(전 중앙정보부장) 회고록-혁명과 우상’이란 책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박정희는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자신이 임명하도록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란 의장인 박정희의 결정을 무조건 추인하는 ‘고무도장’에 불과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재적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통일정책은 국민의 총의로 본다.’(38조 2항)

그러나 초대 대의원들은 임기 6년 동안 통일정책을 결정할 기회를 한 번도 갖지 못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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