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5년 유너바머에 첫 희생자 발생

  • 입력 2006년 12월 11일 02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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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능지수(IQ) 160∼170, 중고교 시절 세 차례 월반(越班), 16세 때 명문 하버드대 입학, 25세 때 미시간대 박사,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조교수….

이미 11세 때 미적분에 관심을 보였다는 천재 수학자 시어도어 카친스키의 이력은 이토록 특별했다. 하지만 그는 교수로 취임한 뒤 불과 2년 만에 홀연 교수직을 내던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무런 이유도 설명도 없었다.

그로부터 27년 뒤인 1996년 그는 ‘유너바머(Unabomber)’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경찰에 체포된 곳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무대가 된 몬태나 주 블랙푸트 강가의 오두막집이었다.

그곳에서 카친스키는 전기 수도 전화도 없이 은둔생활을 하며 반(反)문명 테러를 벌였다. 1978년 한 대학에 보낸 우편폭탄을 시작으로 16차례의 테러를 일으켰다. 3명이 죽고 29명이 다쳤다.

그의 목표물은 대학과 항공사였다. 유너바머란 대학(University)+항공사(Airline)+폭탄테러범(Bomber)에서 따온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암호명이었다.

초기 파이프폭탄은 매우 조악해 경미한 상처를 입히는 정도였다. 하지만 폭탄 제조기술은 갈수록 발전했고 매번 경찰의 오판을 유도하기 위한 가짜 단서를 남겼다.

1985년 그의 폭탄은 한 공군 대위의 네 손가락과 한쪽 눈을 앗아갔다. 급기야 그해 12월 11일 한 컴퓨터 판매상이 그의 폭탄에 목숨을 잃었다. 파편이 흩어지는 정교한 폭탄이었다.

남겨진 단서는 폭탄 부품에 새겨져 있던 ‘FC’ 두 글자. 당시엔 ‘우라질 컴퓨터(Fucking Computers)’ 정도로 추정됐으나 그 의미는 몇 년 뒤에야 밝혀졌다. 카친스키가 1993년 언론사에 편지를 보내 ‘자유클럽(Freedom Club)’의 행위라고 밝힌 것.

그는 1995년 FC의 반문명 선언문 ‘산업사회와 그 미래’를 주요 신문에 실을 것을 요구했다. 3만5000단어에 달하는 이 글이 빠짐없이 그대로 실리면 테러를 중지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게재 여부를 놓고 거센 사회적 논란이 벌어졌으나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기고문을 그대로 게재했고, 이것은 그의 꼬리가 잡히는 결정적 단서가 됐다. 그의 문체를 알아본 동생이 FBI에 제보한 것. 이로써 FBI 역사상 수사에 가장 많은 비용이 들었던 이 사건은 종결됐다.

카친스키는 콜로라도의 경비가 삼엄한 교도소에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살고 있다. 복역 중 한때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던 그는 풍자소설과 논평을 쓰며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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