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2년 서울 시민회관 화재

  • 입력 2006년 12월 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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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체제 경쟁을 벌였던 1960∼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에 가장 뒤진 부분이 남측의 문화시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북한의 만수대예술극장 같은 대공연장에 맞서는 시설을 세우고 싶어 했다.

5·16군사정변 직후인 1961년 11월 7일. 서울 광화문 근처에 4층 규모의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자리)이 건립됐다. 원래 이승만 대통령 시절 이 대통령의 아호를 딴 ‘우남회관’으로 지으려했으나 공사가 지지부진하다 마침내 완공된 건물이다.

요즘 세종문화회관이 예술 공연을 위주로 하는 것과 달리 시민회관은 그야말로 ‘대중음악의 전당’이었다. 한국 최초의 뮤지컬 극단 예그린악단의 ‘살짝이 옵서예’를 비롯해 패티김 최희준 펄시스터즈 하춘화 리사이틀, 윤복희 쇼 등 스타들의 공연이 잇따랐다. 1969년 5월 17일엔 ‘플레이보이배 쟁탈 보컬그룹 경연대회’라는 그룹사운드 페스티벌이 열려 젊은이가 구름처럼 몰려들기도 했다. 당시 민간방송인 MBC와 TBC(동양방송)도 각각 남진과 나훈아 리사이틀을 주최하며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72년 12월 2일 ‘MBC 10대 가수 청백전’이 열리던 시민회관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가수 쇼가 시작된 지 한 시간이 지났을까. 오후 8시 28분경 갑자기 펑하는 소리와 함께 무대 위에 가설된 조명장치가 터지면서 불이 붙었다. 주최 측이 급하게 막을 내렸더니 그 막에 불이 붙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화염이 번져 나갔다.

3000여 관객 대부분은 밖으로 나올 수 있었으나 계단에서 다른 관객에게 밟히거나 무대 뒤 또는 옥탑 근처에서 근무 중이던 사람들이 희생됐다. 사망 51명, 부상 76명. 이 사건은 1971년 대연각호텔 화재, 1974년 청량리역 대왕코너 화재와 더불어 1970년대 전반기 서울시내 3대 화재사건의 하나로 기록됐다.

세종문화회관은 시민회관이 불탄 지 6년 만인 1978년 완공됐다. 박 대통령은 세종문화회관을 5000명이 동시에 입장해 회의할 수 있는 ‘통일주체국민회의’ 회의장으로 지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많은 예술가의 문제 제기로 다목적 공연장으로 설계가 변경됐다.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의 지시로 애초 설계에 없던 파이프오르간도 설치됐다. 일본 NHK홀보다 더 큰 동양 최대의 파이프오르간이었지만 무대 중앙이 아니라 오른편 벽에 설치해야 했다. 개관일은 4월 14일이었다. 김일성 주석의 생일(4월 15일) ‘김 빼기 작전’의 하나로 결정된 날짜였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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