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황혼녘에 떠난 여행…‘찰리와 함께한 여행’

  • 입력 2006년 11월 18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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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황중환 기자
일러스트레이션 황중환 기자
◇찰리와 함께한 여행/존 스타인벡 지음·이정우 옮김·396쪽·1만2000원·공리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려오면 여전히 온몸이 쭈뼛해지며 발이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려오면 여전히 온몸이 쭈뼛해지며 발이 들썩거린다.

…제트기나 시동 걸린 엔진소리, 징을 박은 말발굽 소리만 들어도… 속이 뒤틀리듯 가슴이 꽉 메는 것이다.’

마음을 들뜨게 하는 바이러스엔 약도 없다. 이 오래된 불치병에 속절없이 포로가 된 자는 몸이 근질근질한 청춘이 아니라 58세 노작가다.》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으로 유명한 저자는 “미국에 관해 글을 쓰면서도 미국의 시궁창이 풍기는 진짜 냄새를 모른다면 범죄에 해당될 일”이라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중병을 앓고 난 뒤였지만 “수명을 조금 더 연장시키자고 장렬한 삶을 버릴 생각은 없다”며 짐짓 호연지기도 부린다. 작은 집을 얹은 트럭을 주문 제작해 돈키호테의 애마인 ‘로시난테’라는 이름을 달고 넉 달간 미국 34개 주, 총 4만 리에 이르는 여행길에 나섰다.

여행기라고 하지만 관광성 정보, 미국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원하는 사람은 이 책의 적당한 독자가 아니다. 책을 읽다 보면 지명이나 저자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는 서서히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그보다는 유머작가였다가 탐정이더니 어느새 역사가가 되고 철학자, 저널리스트로 마구 변신하며 종횡무진으로 독자를 이끌고 다니는 저자와의 여행에 푹 빠져들게 된다. 아름다운 번역 덕분에 산문인데도 리드미컬한 문장의 감칠맛이 제대로 살았다. 더군다나 그 무엇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충동에 몸살을 앓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필독서다.

노작가의 길벗은 프랑스산 푸들 찰리였다. 찰리는 저자가 길 위에서 남과 사귈 때 ‘목적하는 사람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가 대화할 기회를 터 주는 대사(大使)’이면서, 저자의 고독을 달래 주는 대화 상대이기도 하다. 저자가 고독할 때 곧잘 찰리를 상대로 푸념을 늘어놓는 대목은 훈훈하고 정겹다.

저자는 까다로운 교통규칙이 허용하는 한 되도록 늑장을 부리며 차를 몰았다. 폭 넓은 간선도로 대신 지선도로를 택해 미국의 뒷골목 풍경을 보여 준다. 여행에서 저자가 가이드가 아니라 주인공인 까닭에 소심하고 정이 많은 그의 캐릭터, 남에 대한 마음 씀씀이도 생생하게 눈앞에 드러난다. 시카고 근처 호텔의 청소를 하지 않은 방에서 잠깐 쉬게 된 저자가 세탁소 꼬리표, 휴지통의 쓰다 만 편지, 담배꽁초, 술 깨는 약의 포장 튜브 등으로 그 방에 먼저 머물던 ‘쓸쓸한 해리 씨’를 상상해 보는 대목 등에서는 탁월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주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시대의 쓸쓸한 공기도 여행기에 스며들었다. 저자가 여행을 한 1960년은 흑백 인종갈등이 심각하던 때였다. 뉴올리언스에서 인종차별주의자의 광기를 목격한 저자는 분노 때문에 여행을 그만두고 귀로에 오른다. 그의 여행은 “출발보다 앞서 시작되었고 돌아오기 전에 먼저 끝나” 버렸다. 생각해 보면 사실 모든 여행이 다 그러하지만….

이 책을 말하려면 번역자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다. 밑줄을 긋고 싶은 대목이 수시로 나올 정도로 맛깔난 문장은 순 우리말을 적절하게 써 가며 공들인 번역에 힘입은 바 크다. 1965년 삼중당 문고로 출간된 것을 새로 펴낸 것인데도 글이 고루하지 않고 세련됐다. 평생 이 책 한 권만을 번역서로 남긴 역자는 이미 세상을 떴고 책 끝엔 역자의 아들이 쓴 후일담이 실렸다. 저자와 직접 연락해 뜻을 일일이 확인해 가며 번역을 했다던 역자의 노력이 감동적이다.

원제 ‘Travels with Charley’.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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