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잊으면 영남 유학은 반쪽”… 김충렬 교수

  • 입력 2006년 11월 1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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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에 14줄, 이병도의 ‘한국유학사’에 7줄, 박종홍의 ‘한국사상논고’에 이름 한 번 나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현상윤 전 고려대 총장이 쓴 ‘조선유학사’에서 3쪽을 할애했지만 그 책도 현 총장이 6·25전쟁 때 납북당한 관계로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김충렬(사진) 고려대 명예교수가 최근 출간한 ‘남명 조식의 학문과 선비정신’(예문서원)에서 소개한 1967년 우리 학계의 남명 인식이다.

오늘날 그 남명은 같은 1501년생인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유학의 양대 산맥으로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40년 전만 해도 수많은 조선 유학자 중 하나에 불과했다. 당시 유학사에 관한 책들을 보면 퇴계는 100쪽, 율곡 이이는 50쪽씩 소개됐다는 것이 김 교수의 회고다.

당대에 ‘퇴계를 내려다본다’(택당 이식)는 평가까지 받았던 남명이 그토록 잊혀진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김 교수는 △조정에 항거해 문묘에 배향되지 못한 점 △제자들이 북인으로 인조반정 이후 정치적으로 매장된 점 △유학 전 분야를 아울렀던 그의 저서 중 주자학 분야만 전승된 점 등을 들었다.

김 교수는 그런 남명을 부활시키는 데 최선봉에 선 학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67년 서울대 한국철학 강좌를 맡으면서 잊혀진 남명사상의 재조명에 나섰다. 당시 그는 조선유학의 네 기둥으로 퇴계의 이론유학, 남명의 정신유학, 율곡의 개혁유학, 다산의 경세유학을 거론하며 남명 유학의 가치를 새롭게 자리 매김했다.

이런 관심은 1976년 남명연구원 초대원장 취임으로 이어졌고, 남명 유적 사적 지정(1984년), 이달의 문화인물 선정(1995년), 남명 탄생 500주년 기념학술대회(2001년), 초등학교 교과서 등재(2002년) 등의 결실을 낳았다.

올해 학술원 회원이 된 것을 계기로 30년을 맡아 온 남명연구원 원장을 내놓으면서 출간한 이번 저서는 그의 40년 남명연구를 온축한 것이다. 남명의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생애와 경의지학(敬義之學)의 사상을 종합해 놓았다.

김 교수는 이 책에서 그동안 남명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놓고 ‘집안 인연’ 등 각종 추측이 난무했던 것과 관련해 “원래 우리 가문(경주 김씨 상촌파)은 노론집안이고, 나의 직계는 ‘남인쪼가리’”라며 “왕권 중심이 아닌 민본 중심의 사상을 편 조선조 으뜸의 도학군자에 대한 존숭의 마음밖에 없다”고 답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남명의 직계인 대북파의 탄압을 받았던 소북 집안의 후손 고 청명 임창순 선생(당시 문화재위원)이 남명의 유적을 사적으로 지정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우리 이후엔 그런 것(가학연원을 따지는 것) 다 없애야지” 하는 말을 남겼다는 후일담도 전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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