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식인의 추억, 그 잔인함의 최후는…‘죽음의 향연’

  • 입력 2006년 10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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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향연/리처드 로즈 지음·안정희 옮김/367쪽·1만6000원·사이언스북스

1950년 어느 날 밤 지구상에서 그린란드 다음으로 큰 섬 뉴기니의 동부 고지대의 한 숲 속에서 여자와 아이들이 모여 ‘침묵의 잔치’를 열었다. 그들은 뉴기니 1000여 부족 중에서도 가장 오지에 사는 포레 족이었다. 성인 남녀가 따로 떨어져 사는 포레 족에게 육식은 남자들만의 특권이었다.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지 못한 여성과 아이들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언제쯤부터 죽은 친척의 시체를 나눠 먹었다. 그날 밤 잔치도 토마시라는 여성의 시신을 그들의 배 속에 묻는 의식이었다.

뉴기니는 식인종의 섬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그 대상이 대부분 타 종족과의 전투 결과에 따른 ‘부산물’이었지 동족을 잡아먹는 경우는 드물었다. 식인문화가 신석기 시대엔 보편적 현상이었다는 학설도 있지만 포레 족 여성들도 이를 떳떳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밤에, 그것도 깊은 숲 속에서 남자들에겐 쉬쉬하며 의식을 치렀고 이를 눈치 챈 백인 인류학자들에게도 극구 감춰 왔기 때문이다.

1957년 호주를 가는 길에 이 마을에 들른 미국의 천재 의학자 대니얼 칼턴 가이듀섹은 포레 족 사이의 새로운 전염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원주민 언어로 ‘주술’을 뜻하는 쿠루라는 병이었다. 이 병에 걸리면 멀쩡하던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고 비틀거리다 실실 바보 같은 웃음을 짓고 결국 걷지도 못하고 음식도 못 먹게 돼 3개월 내에 죽음에 이르렀다.

그렇다. 그것은 현재 유럽과 미국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인간 광우병의 증상과 똑같았다. ‘원자폭탄 만들기’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과학저술가 리처드 로즈가 쓴 이 책은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인간 광우병(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의 비밀을 파헤친 흥미진진한 과학서다.

가이듀섹은 쿠루 증세를 접하는 순간 그것이 또 노벨상 수상을 예약할지 모를 대발견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 희귀병은 그동안의 병리학 상식에 어긋나는 존재였다. 평형감각과 운동을 담당하는 소뇌가 스펀지처럼 구멍이 뚫리는 이 병은 전염병이라고 하기엔 외부 감염의 흔적이 전혀 없었고 유전병이라고 하기엔 발병 빈도가 너무 높았다.

쿠루의 규명에 45년의 여생을 바친 가이듀섹의 행보를 따라가면서 이 병의 친척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첫 번째는 1920년에 보고된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이다. 그러나 이 병은 평균 60세 이상의 노인에게서만 발병했다. 18세기부터 영국 양떼들에게서 발견된 스크래피병은 이들 계보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다. 밍크에서 발견된 전염성 밍크 뇌증, 1985년 영국에서 첫 발병 사례가 확인된 광우병, 그리고 광우병에 걸린 소를 먹은 인간에게서 발병하는 인간 광우병도 쿠루의 사촌들이었다.

서서히 드러나는 이 병의 원인은 충격적이다. 포레 족의 원시적 삶을 사랑했던 가이듀섹도 마지막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했지만 그것은 ‘동족 섭취’에 있었다. 쿠루는 식인, 스크래피와 밍크 뇌증 및 광우병은 동물성 사료 섭취,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은 인체성장 호르몬 투여나 조직 이식 같은 ‘하이테크 식인주의’의 산물이었음이 밝혀졌다.

과학적 고민이 윤리적 고뇌로 전환되는 대목에 이 책의 묘미가 있다. 더 많은 우유를 짜내기 위해 초식성인 젖소를 육식성으로 바꾸고, 동종의 고기를 먹인 인간의 오만함이 낳은 끔찍한 결과를 음미하다 보면 자연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된다. 원제 ‘Deadly Feasts’(1997년).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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