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독일 음식남녀의 ‘맥주와 사랑’

  • 입력 2006년 10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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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와 사랑을 찾아 서울에 온 세 명의 독일인이 있다. 국내 유일의 독일인 웨이트리스 나딘 라우세(가운데)와 그녀의 애인인 요리사 엔스 트라이들러(왼쪽), 양조사 요하임 펠버. 원대연 기자
맥주와 사랑을 찾아 서울에 온 세 명의 독일인이 있다. 국내 유일의 독일인 웨이트리스 나딘 라우세(가운데)와 그녀의 애인인 요리사 엔스 트라이들러(왼쪽), 양조사 요하임 펠버. 원대연 기자
《맥주 향이 솔솔 풍기는 곳.

그곳에 하얗고 작은 얼굴이 독일 전통의상과 잘 어울리는 그녀가 있다.

추억의 만화영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떠오른다.

하지만 크지 않은 손에는 8개의 커다란 맥주잔이 들려 있다. 나딘 라우세(27).

국내에 한 명뿐인 독일인 웨이트리스다.

라우세의 남자 친구는 만화영화의 페터와 같은 양치기가 아니다.

주방에서 바쁘게 손을 놀리는 요리사 엔스 트라이들러(40)다.

이 커플 곁에는 알름 할아버지 대신 멋진 카이젤 수염을 기른 브루마이스터(양조사) 요하임 펠버(43)가 있다.

가을은 햇보리로 만든 맥주가 제 맛을 내는 계절이다.

23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하우스맥주 전문점 ‘호프브로이하우스 서울’에서 사랑과 맥주를 벗 삼아 살아가는 세 명의 독일인을 만났다.》

○ 라우세와 사랑

그녀는 2월 한국에 왔다. 남자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아예 눌러 앉았다.

라우세는 독일 중부에 있는 튀링겐 주의 에어푸르트 출신이다. 옛 동독지역이다. 트라이들러는 동남부 바이에른 주 로젠하임이 고향이다.

한국으로 치면 ‘남남북녀(南男北女)’인 셈이다. 이들의 사랑에도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3년의 나이 차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출신 지역 때문에 집안 간의 갈등이 있었다. 게다가 트라이들러가 직장 일을 이유로 외국(한국)으로 가버렸다. 그래서 라우세는 간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독일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것은 나쁜 선택이 아니다. 간호사로 일하지 못해 아쉽지만 그래도 만족한다. 해외 생활이 처음이지만 트라이들러가 있고,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다.”(라우세)

이날은 라우세의 생일이었다. 전날 독일인 친구들과 어울려 생일 파티를 했지만 호프브로이에서도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 맥주와 한국 음식

지난해 문을 연 이곳은 정통 독일식 맥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보리와 호프 등 모든 재료를 독일에서 공급받는다. 철저하게 규정된 양조법을 지키고 있다.

뮌헨에 있는 호프브로이하우스는 400여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맥주 주점이다. 좌석이 3600개에 이르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에는 하루에 1L짜리 맥주 3만6000잔이 팔린 기록도 있다.

호프브로이하우스의 한국 1호점인 이곳도 현지와 같은 맥주 맛을 표방하고 있다. 한국인에게는 조금 쓰게 느껴진다.

4년째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펠버는 한국 음식 마니아다.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데다 음식은 종류에 관계없이 일단 먹어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개고기까지 경험했지만 한 가지는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홍어는 한번 도전했지만 너무 힘들었다. 홍어를 제대로 먹어야 한국사람 대접을 받는다는데 아직 자신이 없다.”(웃음)

생일축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라우세가 케이크를 잘랐다. 맥주잔이 오가기 시작하자 트라이들러가 “한국 사람에겐 김치가 있어야 한다”며 주방에서 사우어크라우트를 가져왔다. 양배추를 싱겁게 절여서 발효시킨 ‘독일식 김치’다.

“요리사라는 직업 때문에 가급적 현지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한다. 불고기도 맛있지만 만두가 가장 좋다.”

○ 맥주와 폭탄주

맥주의 본 고장에서 성장한 이들에겐 한국의 술 문화가 여전히 생소하다.

“독일 사람들은 주로 맥주와 음식을 함께 먹는다. 한국에서는 음식을 소주와 먹더라. 몇 번 시도했지만 도수가 높아 조금 고생했다.”(트라이들러)

세 사람은 두 나라의 술 문화가 많이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독일인들이 맥주나 와인을 조금씩 천천히 마시는 반면 한국인의 음주 속도는 정말 빠르다고 했다.

이들은 ‘폭탄주’를 정확하게 우리말로 발음했다.

“일산에서 일할 때 동료들과 어울려 폭탄주를 마셨다. 처음에 조니 워커 블랙을 섞더니 나중에는 블루까지 나왔다. 분위기 때문에 마셨지만 맛은 없었다. 내 생각에 둘을 섞는 것은 위스키나 맥주 모두 제 맛을 ‘희생’하는 것이다.”(펠버)

○ 맥주와 인생

이들에게 맥주는 어떤 의미일까.

펠버는 “태어나 20년간은 맥주 마시는 법을 배웠고, 그 뒤에는 맥주 양조 기술을 배웠다”고 말한다.

그는 ‘맥주는 즐거움’이라고 정의했다. 트라이들러가 펠버의 불룩 나온 배를 가리키며 “저 배를 보면 맥주를 얼마나 즐기는지 알 수 있다”고 응수했다.

펠버는 “물 호프 맥아 효모의 네 가지 재료만으로 1만 종류의 맥주를 만들 수 있다”며 “맥주 맛이 제대로 나올 때 얻는 즐거움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라고 말했다.

라우세는 “맥주는 비타민까지 살아 있어 건강한 음식”이라며 “음식이 바뀌고 환경이 달라졌지만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맥주 덕분인 것 같다”고 가세했다.

트라이들러는 한술 더 뜬다. “맥주는 공기다. 삶에 꼭 필요한 존재다. 내게서 맥주를 빼앗는다면 물을 벗어난 물고기처럼 살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자 라우세가 남자 친구를 흘겨보며 “삶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너무 많이 마시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 맥주와 축구,사이렌

세 사람은 이곳 매장에서 2006년 독일 월드컵 축구대회를 지켜봤다. 월드컵 ‘특수’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우승이 유력하게 점쳐졌던 독일이 4강에서 탈락하는 바람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맥주와 축구, 축구와 맥주는 뗄 수 없는 것이다. 축구를 보면 자연스럽게 맥주를 마시게 된다. 어느 것 하나가 빠지면 그것은 ‘애정 없는 섹스’일 뿐이다.”(펠버)

이들은 16일 갑자기 울린 사이렌 때문에 크게 놀랐다고 했다. 민방위 훈련의 공습경보 사이렌이었다. 북한 핵과 관련된 뉴스가 계속 보도된 터라 ‘큰일’이 터진 줄 알았다는 것.

“어떤 장애물 없이 사랑하는 사람끼리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에서 그런 날을 축하하며 맥주를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라우세)

그곳에 가면 세 명의 유쾌한 독일인을 만날 수 있다.

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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