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경제지'를 번역중인 젊은 그들

  • 입력 2006년 10월 23일 14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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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삼송도추한의원 3층에서 250여만 자에 이르는 풍석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번역을 위해 씨름하고 있는 젊은 한학자들. 강병기  기자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삼송도추한의원 3층에서 250여만 자에 이르는 풍석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번역을 위해 씨름하고 있는 젊은 한학자들. 강병기 기자
서울 동작구 노량진 삼송도추한의원 3층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조선의 다빈치'라 불리는 인물이 남긴 방대한 한문책 번역의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다. 워낙 광범위한 분야와 방대한 양으로 인해 국역전문기관인 민족문화추진회에서도 몇 차례나 한글번역을 추진했다가 무산됐다는 '마의 책',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다.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을 익힌 젊은 학자 19명이 뜻을 모으고, '최선외국어학원'의 송오현 원장이 3억여 원의 번역지원금을 쾌척해 2003년 3월부터 번역에 들어간지 3년6개월째.

이들은 규장각본, 고려대본, 오사카본 등 3개 필사본을 비교분석하며 원문을 확정하고, 구두점을 찍고, 1차 번역을 마친 뒤 다시 2~5명이 한 팀으로 16개 팀을 구성해 교열작업의 70%를 마쳤다.

21일 오후 임원경제지의 16지(志) 중 하나이지만 분량은 전체의 40%(150여만 자)를 차지한다는 '인제지(仁濟志)'의 교열 현장을 찾았다. 예방의학을 다룬 보양지(保養志)와 달리 치료의학을 다룬 인제지는 '동의보감' 보다도 많은 의학정보와 그 못지않은 전문성을 지녔다.

교열팀원 중 한명인 전종욱(36) 삼송도추한의원 부원장은 "인제지는 동의보감의 내용은 물론이고 명대의 '본초강목', 청대의 '의종금감' 등 당시 최신의학정보가 집결돼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한의학 관련 서적을 전부 모은 '한의약서고'에도 실려 있지 않다"고 설명했다.

학부에서 한의학, 경제학, 철학, 국문, 한문학을 전공한 인제지 팀 5명의 교열작업 풍경은 두꺼운 옥편을 갖다놓고 돋보기로 원문과 대조작업을 펼치는 전통적 방식과 큰 차이가 있었다. 이들은 컴퓨터 모니터로 청나라 때 중국고전을 집대성한 '사고전서'와 30여만 어휘를 자랑하는 '한어대사전'의 디지털DB를 불러내거나 중국 최대검색 인터넷사이트 '바이두(百度)'를 검색해가며 난상토론을 통해 오류를 시정해갔다. 또한 인제지에 인용된 '의종금감' 등 의서의 원문을 직접 대조해가며 필사본이 지닌 오류까지 잡아냈다.

이들 이외에도 생물학, 식품영양학, 건축학, 국악을 전공한 학자 수십 명이 번역작업을 돕고 있지만 서유구의 방대한 지식 세계 앞에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이번 번역의 산파역할을 맡은 정명현(37) 한국산업기술대 강사는 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저희 중에 한명이라도 전문번역가가 있었다면 결사적으로 말렸을 거예요. 선학들이 왜 이 책의 번역에 엄두를 내지 못했는지 뼈저리게 깨닫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분야에 대해 그처럼 전문적 지식을 갖고 있었는지 저희에게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서유구는 말년에 이 책을 완성했으나 부인과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 후세에 전해질 가능성이 사라지자 "죽기 전에 간행하자니 힘이 없고 장독을 덮어버리기엔 아까움이 있다"고 통탄했다고 한다. 그 책은 서유구 사후 160여 년 만인 내년 3월부터 33권(권당 500쪽) 분량의 책으로 세상의 햇빛을 본다.

기성학자들이 '인문학의 위기'라고 목소리만 높이고 있는 상황에서 미래의 인문학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묵묵히 실천한 '젊은 그들'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임원경제지는 어떤 책▼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풍석 서유구(1764~1845)가 홍만선의 '산림경제'를 뼈대로 농축수산업, 원예, 요리, 염색, 기상, 지리, 의약, 건축, 음악, 서화 등 실생활과 관련한 16개 분야의 지식을 백과사전적으로 집대성한 책이다. 모두 113권(오늘날 '장'의 개념) 52책 250여만 자에 이르는 이 책은 단일 서적이면서도 전체 분량이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에 필적해 조선시대 개인의 단일저술로는 가장 방대한 것으로 꼽힌다. 이 같은 저술이 가능했던 것은 서유구 가문의 독특한 내력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그의 달성 서씨 집안은 성리학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 등 다양한 학문에 정통했던 서거정의 학풍을 이어받고 소론가문이면서도 선조 때 명신 약봉 서성을 정점으로한 왕성한 관직진출로 재력을 축적한 경화세족이었다. 풍석의 조부 서명응과 부친 서호수는 외교관으로 여러 차례 청을 오가며 선진문물을 입수했을 뿐 아니라 역학과 수학, 천문학에 밝았다. 특히 서호수는 조선조 최고의 수학천재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또 풍석의 형수는 조선시대 여성생활백과사전이라 할 '규합총서'를 쓴 빙허각 이씨다. 풍석이 30여년에 걸쳐 집필한 임원경제지는 이렇게 축적된 가문의 지적 역량의 총화라 할만하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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