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버스안내양 정화숙 씨의 ‘한가위로 가는 버스’

  • 입력 2006년 10월 5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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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전 충남 태안군 태안읍∼근흥면 마도리행 버스 안. 전국에서 한 명뿐인 버스 안내양 정화숙(오른쪽) 씨가 잠시 틈을 내 승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태안=지명훈  기자
4일 오전 충남 태안군 태안읍∼근흥면 마도리행 버스 안. 전국에서 한 명뿐인 버스 안내양 정화숙(오른쪽) 씨가 잠시 틈을 내 승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태안=지명훈 기자
충남 태안군을 고향으로 둔 귀성객들은 올 추석 특별한 추억을 만나고 있다. 20여 년 만에 부활한 버스 안내양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일 오전 9시 50분경 태안읍 남문리 태안공영버스터미널에서 근흥면 마도리행 시내버스(농어촌버스)에 올랐다.

“오라이∼.” 안내양 정화숙(39) 씨가 차 문 옆을 “탕, 탕” 때리자 버스가 출발했다.

3분 뒤 태안읍내 옛 터미널 승강장에 도착하니 추석 차례 음식을 한 꾸러미씩 든 승객들이 차례로 버스에 오른다. 정 씨는 노인들의 물건을 일일이 버스로 올려 준다.

버스 문이 닫히려는 순간. 정 씨가 운전사 이석우(46) 씨에게 “잠시만요”라며 갑자기 승강장으로 내닫는다.

“어머님, 왜 그러고 계세요. 이 차 타셔야 하잖아요.”

하마터면 차를 놓칠 뻔한 김억순(74) 할머니는 미안한 듯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어. 나이 먹으면 그래” 하고 정 씨를 향해 웃는다.

이 차는 테이프를 돌려 안내하지 않는다. “○○ 승강장입니다”라는 기계음 대신 “아버님, ○○인데 안 내리세요”라는 육성이 들린다.

정 씨는 낯선 승객이 보이면 노선을 다시 한번 큰소리로 알려준다. 그러면 일부 승객은 “아, 잘못 탔네”라며 황급히 내린다.

달리는 버스 차창 밖으로 황금 들녘이 펼쳐졌다. 근흥면 채석포리를 지나니 버스 안으로 바다 비린내가 훅 들어온다. 정 씨는 간간이 승객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또 병원 다녀오시죠.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네.”

“맨날(만날) 다녀도 잘 안 나서(나아). 비러(빌어)먹게도.”

“어제 서해대교 교통사고 들으셨죠. 아들한테 정신 바짝 차리고 내려오라고 전화 좀 하셨어요?”

“그려, 겁나게 끔찍하데. 증말로(정말로) 츤츤히(천천히) 오라고 했어.”

버스가 신진도대교로 접어들자 갈매기가 버스에 그려진 갈매기 그림을 동료로 착각한 듯 주변으로 몰려든다.

아버지 정용목(68·경북 경산시) 씨는 화숙 씨가 아홉 살 될 때까지 시내버스 운전사를 했다. 그래서 운전사 아저씨나 안내양 언니가 집에도 놀러왔고, 같이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아버지 정 씨는 “지금 네가 하는 안내양 일은 예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용기를 북돋아 준다.

7월에는 젊었을 때 안내양 생활을 했다는 50대 중반의 아주머니가 충남 천안에서 일부러 버스를 타러 왔다.

“그때는 한 사람이라도 더 태워야 했어.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에 승객을 더 태우기 위해 차문의 난간을 잡고 밀어 넣었지. 지금도 팔 힘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세.”

태안군 문태준 교통행정계장은 “2월부터 도입한 버스 안내양이 주민이나 관광객에게 정취를 주기 때문에 호응이 좋다”며 “내년에는 1, 2개 노선에 안내양을 더 둘 계획”이라고 말했다.

돌아오는 길에 차에 오른 윤일파(71·근흥면 안기리) 씨는 “정 씨가 있는 버스를 타면 20년 전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어 젊어지는 기분이다”고 말했다.

태안=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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