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한국의 식민지 근대성’

  • 입력 2006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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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식민지 근대성/신기욱·마이클 로빈슨 엮음·도면회 옮김/624쪽·2만8000원·삼인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했을까. 국가를 상실한 채 이민족에게 수탈당하는 슬픈 민족과 대일본제국이 건설한 대동아공영권에서 일신의 영달을 꾀하려 한 충견. 이는 민족과 반민족의 이분법에 투철했던 한국 역사학계가 그려낸 당대 한국인들의 익숙한 초상이다.

1999년 미국 하버드대출판부에서 영어로 간행된 것을 번역한 이 책은 이런 획일적 정체성 규정에 반기를 들었다. 1993년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 내 한국 학자들의 워크숍에서 출발한 이 책의 문제의식은 역사적 사건을 해석할 때 민족주의를 일종의 선험적인 담론체계로 받아들임으로써 다채롭고 중층적 역사해석을 차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 전략은 바로 당대 한국인이 어떻게 자기정체성을 만들어갔는가에 대한 연구였다. 이에 따르면 민족은 식민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표준화되고 재발명된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 조선인을 상징하는 농민에 대한 관심 증폭은 그들이 발전과 근대화에 물들지 않은 조선 고유의 민족성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식민주의가 농민을 ‘우매한 조선인’으로 상징화했던 전략을 역으로 구사했다는 점에서 결국 식민주의의 산물이다.

일본 식민체제의 저항수단으로만 인식되던 각종 농민·노동조합이 국가의 사회지배 강화나 효과적인 전시총동원체제 전환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역설이나, 조선총독부와 일본 본국 정부가 전기통신시설 관할권을 놓고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는 연구도 기존의 이분법적 시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사안들이다.

이런 시각은 한국학계에서 논쟁이 진행 중인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조선에서 싹튼 근대화의 맹아가 일제의 침략으로 고사했다는 ‘내재적 발전론’과 비록 폭압적 방식이었지만 일제의 식민통치를 통해 근대적 법과 제도가 이식됐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은 모두 근대화를 진보로 바라보는 서구의 일원적 단선적 역사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시작된 이 책의 주제가 최근 들어 한국학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는 점은 씁쓸한 대목이다. 그러나 한국학의 본고장을 자처하면서도 그 주된 문제의식을 해외에서 역수입해야 하는 한국학계의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그 쓴맛을 견디는 와신상담의 자세가 필요할 때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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