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혁명, 포르노 소설이 달궜다

  • 입력 2006년 8월 1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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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강조했으나 혁명의 동력 중 하나가 금서로 낙인찍힌 책들의 은밀하고 광범위한 유통에 숨어 있었음을 최근의 신문화사연구가 보여 주고 있다. 그림은 프랑스혁명 때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사진 제공 도서출판 길
프랑스혁명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강조했으나 혁명의 동력 중 하나가 금서로 낙인찍힌 책들의 은밀하고 광범위한 유통에 숨어 있었음을 최근의 신문화사연구가 보여 주고 있다. 그림은 프랑스혁명 때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사진 제공 도서출판 길
우리는 프랑스혁명을 계몽주의의 개가로 기억한다. 또한 혁명에 반대한 구체제(앙시앵 레짐)를 부패와 무능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서양사학자 주명철(56·사진) 한국교원대 교수는 이런 이분법을 깨면서 합리적인 계몽주의의 역할만큼이나 당시 불법유통되던 문헌들을 통한 선동적인 대중 여론의 형성이 혁명을 이끌어 낸 요소라고 말한다.

그는 프랑스 파리1대에서 자신이 쓴 박사논문을 번역한 ‘바스티유의 금서’(1990년)를 대폭 보완해 최근 ‘서양금서의 문화사-프랑스 계몽주의 시대를 중심으로’(길)를 새로 펴냈다. 원래보다 두 배 분량으로 두툼해진 이 책은 1750∼1789년 ‘바스티유 문서’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킨 것이다. 바스티유 문서는 정치범 수용소로 악명 높던 바스티유 감옥에 보관되던 온갖 금서의 목록과 그 재판 기록이 담겨 있다.

이 책은 당시 어떤 금서가 있었고, 또 금서들이 어떻게 검열을 피해 대중에게 유통됐으며, 대중은 이를 어떤 식으로 읽었는지를 보여 준다. 주 교수에 따르면 당시 금서 중에는 계몽적 책들 못지않게 왕실과 귀족사회를 저급하게 비방한 책도 많았다.

“프랑스혁명을 앙시앵 레짐의 구조적 모순과 정치적 무능이 야기했다고 설명하는 것은 혁명가들이 과거의 것은 모두 나쁘다고 싸잡아 비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혁명 이후 등장한 지도자들이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혁명을 추동한 것은 행상인들이 싸게 판매한 불온한 소책자들의 급속한 유통에 있었습니다.”

소책자 중에는 볼테르나 루소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의 저서도 있었지만 왕실 귀족의 스캔들과 정치적 중상비방이 담긴 책도 상당수였다. 17세기 금서 목록의 과반수를 차지하던 종교 관련 서적은 18세기 말 5%까지 줄어든 데 비해 17%에 불과하던 역사와 문학 서적은 69%로 급증했다. 역사 서적 중 60%가량은 정치적 중상비방을 다룬 책이었고, 문학 서적 중 소설의 20%는 음란 서적이었다.

“루이 14세 통치기만 하더라도 왕실이 권위의 상징이었던 까닭에 왕은 제대로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180년도 안 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는 음란물의 주인공으로 전락합니다. 철옹성과 같던 국가의 권위가 대중출판의 힘에 무너진 것입니다.”

프랑스혁명 직전, 정보의 침투력 못지않게 놀라운 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유통 속도였다.

“당시 구중궁궐에서 벌어진 일들은 이른바 ‘카더라 통신’을 통해 빠르게 퍼졌습니다. 바스티유 재판기록을 보면 하루 전날 베르사유 궁에서 왕이 했던 말을 파리 교외의 농민이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가장 탄복할 만한 부분은 이 연구에서 인용된 300여 건의 1차 사료 대부분을 저자가 직접 보고 썼다는 점이다. 루이 16세 시절에 왕비를 사칭해 발생한 사기사건과 이를 둘러싸고 유포된 왕비와 왕실에 대한 비방이 어떻게 국가권력을 무력화했는지를 다룬 책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마리 앙투아네트 신화’(2004년)의 1차 사료도 그가 직접 발굴해 냈다.

“2년에 한 번꼴로 프랑스에 한 달여간 머물면서 국가기록보존실과 국립도서관, 외교부가 보관 중인 고문헌들을 읽고 있습니다. 한국에 태어나 서양사를 전공한 학자로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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