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법관은 떠났어도 판결은 살아있네…‘판사 한기택’

  • 입력 2006년 7월 22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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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한기택/한기택을 기억하는 사람들 엮음/244쪽·1만 원·궁리

“정의를 이야기할 때, 왜 영화는 눈에 붕대 맨 여자나 고추 따위를 다는 데 쓰는 저울을 보여 주는지 모를 일이다.”

카렐 차페크는 단편집 ‘단지 조금 이상한 사람들’에서 그렇게 말했다. 법이 해결해 줄 것으로 믿는 정의의 상징이란 게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통찰력 있게 표현하고 있다.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상징이나 표상은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법이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몫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불만에 찬 표정에 갇혀 있는 요즘 아닌가. 거기에 덮친 격으로 몇몇 판사의 비리 사건까지 터져, 뭔가 자리를 잡으려던 사법부의 신뢰도가 또 흔들리기 시작했다. 판사가 말하면 그게 정의냐고 힐난한다. 시민단체에선 엊그제 법원 앞에 가서 제대로 밝히고 처리하라고 시위했다. 이럴 때 이 책이 나왔다.

‘판사 한기택’, 마치 명패처럼 간명하다. 제목이 말해 주듯이 어느 판사의 짧은 일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책이다. 보통의 시민들에겐 ‘어느’ 판사지만, 법조계에선 ‘그’ 판사였다. 헌신적으로 성실하고, 뛰어나게 유능하며, 게다가 고뇌하는 법관이란 평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있던 지난해 여름 가족과 함께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에 휴가여행을 갔다가 그곳의 쪽빛 바다에서 세속을 하직했다.

죽음은 결코 불행이 아니라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사고는 많은 법조인에게 충격과 안타까움을 던졌다. 적도 부근의 바다에서 해체된 그 기억을 모은 책의 내용은 짐작할 만하다. 기자가 쓴 그의 약전, 그의 일기와 편지, 그리고 동료 법관들의 회고담이다. 엘리트 판사의 모범적인 학창시절이 일반 독자에게 특별할 것은 없다. 하지만 최근 헌법재판소 결정과 달리, 2004년 시각장애인들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주고 있는 규칙이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한 대목은 눈에 띈다. 보통사람의 직업 선택의 자유보다 소수자의 생존권을 더 배려했다. 말하자면 이런 게 살아 있는 법철학이다.

정작 이 책을 일반인에게도 권할 수 있는 명분은 그의 일기에 있다. 판사의 지난 시절 일기는 보편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1980년 11월의 일요일에 이렇게 썼다. ‘11월은 회색. 2월과 쌍벽을 이루지. 사람들 마음은 추락한다.’

우리는 안네 프랑크나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를 읽으면서, 한기택의 삶은 외면할 이유가 없다. 인간으로서의 면모와 직업 법관으로서의 고민이, 법률가가 되기 전 열정적으로 쓴 연애편지에 모자이크돼 있다.

이 책은 마치 사법부를 질시하는 모든 사람에게 호소하는 듯하다. 이 책의 일반성은 거기서 찾을 수밖에 없다. 한 판사의 애석한 죽음을 계기로 마련된 법원 안팎의 소통을 위한 우아한 손짓이다.

차병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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