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따라 대형 스포츠 이벤트 중계에 대한 편성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상파들의 다걸기 행태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등 세계적인 스포츠 이벤트마다 반복될 우려가 높기 때문이다. 지상파들의 월드컵 중복 편성을 방관해 비판을 받았던 방송위원회도 하반기 편성정책연구위원회를 구성해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했다.
유재천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특임교수는 외국처럼 방송사 간 순서를 정해 한 채널에서만 경기를 방영해 시청자의 채널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은 공영방송인 NHK가 전체 경기의 절반가량을 중계하고 나머지는 민영 방송사들이 순번을 정해 방영한다. 독일은 하루에 열리는 모든 경기는 한 채널이 맡도록 해 시청자들의 혼돈을 막고 있다. 프랑스와 영국도 같은 경기를 다른 채널이 동시에 중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포츠 중계권료 및 광고료와 제작비를 공개하도록 하는 것도 스포츠 중계 경쟁의 과열을 막고 시청자 부담을 줄이는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공영방송발전 시민연대(공동대표 유재천)는 지난달 말 지상파 3사와 한국방송광고공사에 월드컵 중계권료와 광고료, 해설자 출연료, 제작비에 대한 정보 공개를 요구했다. 이 단체는 공개가 이뤄지지 않으면 방송사를 서울행정법원에 제소한다는 방침이다.
▽과도한 월드컵 특집, 빈약한 기획=이번 월드컵 중계방송은 편성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낙제점을 면하지 못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11일 지상파 3사의 월드컵 특집 프로그램을 모니터한 보고서를 내고 “‘특집’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빈약한 내용으로 시청자들의 볼 권리를 박탈했다”고 지적했다. 주요 경기 장면을 반복 편집해 엇비슷한 프로그램을 양산하고, 출연진이 빨간 옷만 입고 나오면 모두 ‘월드컵 특집’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다는 지적이다.
KBS2 ‘스타 골든벨’(6월 12일 방송)은 여자 출연자들을 월드컵 미녀 응원단이라고 명명하고 월드컵과 관련된 문제를 출제한 뒤 ‘특집’으로 이름 붙였다. MBC ‘요리보고 세계보고’(6월 12일) 월드컵 특집에서는 일본 선수들이 자주 이용하는 음식점을 소개했으며, SBS는 ‘TV 동물농장’(6월 18일)에서 오랑우탄과 강아지에게 선수복을 입혀 특집이라고 내세웠다.
김인규 고려대 언론대학원 석좌교수는 “전체 방송 시간 중 몇 시간을 월드컵에 할당할지 목표치를 설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과도한 월드컵 편성이 볼 권리를 박탈할 뿐만 아니라, 스포츠 민족주의를 부추겨 월드컵에 문제를 제기하는 소수를 위협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신문선 SBS 해설위원이 한국과 스위스전에서 벌어진 오프사이드 논란으로 조기 귀국 조치를 당한 게 대표적인 사례다.
김정태 방송위원회 정책2부장은 “방송사 자율로 중복 편성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듯 하다”며 “월드컵 중계 편성 분석 결과가 나오는 대로 전문위원회를 구성해 개선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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