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325년 니케아공의회 개최

  • 입력 2006년 6월 19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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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년 6월 19일,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서쪽 끝에 있는 니케아에서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초청으로 공의회(가톨릭 주교들이 교리 문제 등을 협의 및 결정하는 공식적인 종교회의)가 열렸다.

기독교회의 주교 모임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니케아 공의회’는 의미가 특별하다. 여기서 결정된 ‘기독교의 모습’은 중세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이었고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기본 교리로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전례 없이 황제가 직접 주교들을 초청한 이유는 한마디로 신과, 신의 아들이라는 예수가 ‘동위(同位)냐 아니냐’는 논란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사제인 아리우스가 신과 예수는 동위가 아니라고 주장한 데서 논란이 시작됐다. 그에 따르면 신은 궁극적이고 영원한, 불가지한 존재지만 예수는 지상에서 태어나고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 명확하기 때문에 신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성부(신) 성자(예수) 성령이 동위라는, 당시 기독교의 정통교리인 ‘삼위일체’와 배치됐기 때문에 아리우스는 파문과 함께 소속 주교구에서 추방당한다. 그러나 아리우스가 가는 곳마다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급기야 로마제국의 동방에서 기독교 세력이 양분되기에 이른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 ‘삼위일체’를 재확인하고 이를 통해 기독교회 조직의 통일을 이룬다.

그는 왜 그토록 기독교 통일에 열심이었을까. ‘신의 뜻에 충실했기 때문’이라면 더는 말이 필요 없지만 역사가들은 다른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주교가 관장하는 교구 안에서 주교의 세금징수권과 인사, 사법권을 인정했다. 또 성직자의 공무와 납세의무를 면제했다.

그 결과 주교들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열광한 것은 당연하다. 주교들을 장악하는 것은 제국의 통치에 중대한 의미가 있었다. 당시 교리에 따르면 일반인은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신의 뜻은 ‘신의 대리인(주교)’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주교가 황제 편이면 신의 뜻도 황제 편이기 마련이니 황제는 곧 신의 현세적 대리인이 된다.

이때부터 제위 세습을 둘러싼 갈등과 분란은 ‘신의 뜻’이라는 한마디로 종식된다.

통치의 정당성을 신에게서 찾는 이런 방식은 프랑스혁명 때까지 1400여 년간 지속된다. 대관식은 이런 사상의 잔재다. 왕은 신의 뜻을 전하는 주교 앞에 무릎을 꿇고 주교는 지배권의 상징인 왕관을 왕의 머리에 올려놓는 것으로 정당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통치자들은 ‘신의 뜻’ 대신 ‘국민의 뜻’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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