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의 열기 속으로 30선]<3>아이거 북벽

  • 입력 2006년 5월 20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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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 스크루를 하나 치고 오르다 위를 보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소리의 속도보다 더 빨리 떨어지는 낙빙에 얼굴을 맞았다. 찢어진 입술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얼음 위에 빨갛게 번졌다. 하지만 내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올라가는 것밖에 더 있겠는가? 불과 한 뼘도 안 되는 옆을 스치고 떨어지는 낙빙과 낙석 중에는 머리보다 더 큰 바위 덩어리도 있으나,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우리는 그냥 운명에 맡기며 점차 무신경해져 갔다. 아니, 그런 척했다. ―본문 중에서》

아이거는 스위스 알프스의 베르네 오버란트에 있는 산이다. 해발 3970m로 특별히 높지는 않지만 위험하기로 악명이 높다. 전설적인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곳을 ‘지구에 남은 3대 난코스의 하나’로 꼽았다.

‘아이거 북벽’의 저자 정광식은 1982년 동료 둘과 나섰다. 계획은 오직 사흘이었다. 하루만 지체돼도 죽음으로 몰고 갈 굶주림과 악천후가 기다릴 터였다. 그런데 겨우 닷새 만에야 정상에 오를 수 있었고, 마지막 이틀은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버텨야 했다. 육신은 탈진하고 정신은 가사 상태에서 하산할 때 기적처럼 바위 위에서 초콜릿 네 개를 발견했다. “이거 하나씩이면 하루치 식량이다”라고 외치며 하나씩 먹어치웠다. 하지만 남은 하나는 도로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더 굶주린 사람을 위해.

‘아이거 북벽’을 읽기 전부터 이 에피소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바보처럼 여겨졌다. 당연히 남은 초콜릿을 세 조각으로 나눠서 먹고 와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저자가 동료들과 함께한 험난한 등정 과정을 다 읽고 나자 모든 것이 이해됐다. 빼어난 산악문학으로 손꼽히는 ‘아이거 북벽’은 자일로 서로 목숨을 확보하거나 내맡겨 본 사람들만이 형성할 수 있는 독특한 유대관계를 들려준다.

아주 험한 코스는 아니지만 나도 ‘등반’이라는 걸 해 본 적이 있다. 조금만 참으면 멋진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선배의 꾐에 넘어가 몽블랑에 간 것이다. 가이드와 선배, 나 셋이서 자일로 연결하여 올랐으므로 한 사람이 주저앉으면 모두 정상을 포기해야 했다. 오직 자신의 고통과 싸우며 간신히 한 발짝씩 떼고 있었다. 눈길이 비교적 평평해지기 시작했을 때 선배가 말없이 나를 앞세우고 가이드와 둘이서 뒤따랐다. 영문도 모르고 10여m 더 걷다 보니 정상이었다. 그 백색의 혼돈 중에서도 그들은 내게 ‘일등 등반’을 선물한 것이었다.

양쪽이 가파른 설사면으로 이뤄진 능선을 따라 난 가느다란 길을 앞장서 걷다 보면 두려움과 묘한 희열을 함께 느끼게 된다. 발을 헛디뎌도 자일로 연결되어 누군가가 나를 잡아 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때 나도 산이 선물하는 ‘관계’를 조금은 맛본 듯하다. 하지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짙은 감정은 아이거 북벽을 오르지 않고서야 평생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아이거 북벽’을 읽으면서 이렇게 위험한 곳을 왜 굳이 갔을까 하는 의문이 내내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산 아래 세계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위험 안으로 뛰어들지 않았을 뿐, 우리 또한 “낙석에 맞아 죽는 것이 주어진 운명이라면 따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아이거 북벽 등정이라면 천만금을 준다 해도 사양이다. 저자가 산사람들의 세계를 솔직하게 보여 주고 있는 이 책을 통해 그들 사이의 독특하고 끈끈한 관계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래서 저자가 더욱 고맙다.

문건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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