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 입력 2006년 5월 13일 02시 59분


코멘트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심경호 지음/346쪽·1만3000원·한얼미디어

‘저는 외곬이라서 아무리 궁해도 구걸을 못합니다. …관원의 초청을 기대한 적도 없고 내 편에서 나아가 뵙지도 않았습니다. 그게 다 제 천성이 도도하여 그런 것입니다. …안주와 술을 보내 주시고 또다시 쌀을 보내 주시니 멀리 바라보며 이제 축수하여 덕을 기리고, 찬미하는 시 몇 편을 적어 별지에 올립니다.’

1487년 설악산 자락에 은둔해 있던 김시습이 양양 부사 유자한의 벼슬살이 권유를 거절하며 쓴 편지다. 일체의 속박을 거부한 김시습, 그를 안타깝게 여겨 세상에 끌어내려 한 유자한의 격의 없는 우정은 김시습이 계속해서 쓴 거절의 편지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유자한의 따뜻한 관심에 감사하면서도 끝까지 속세에 섞이길 거부한 김시습은 ‘깔깔대며 웃는다’라는 시를 지었다.

‘나는 알지, 나는 알지/손뼉 치며 깔깔 한바탕 웃노라/고금의 잘난 이 모두 양(본질)을 잃었나니/시냇가에 초가지어 사는 것만 못하리/험한 길에 발붙이려 분주하다만/편히 앉아 아침 햇볕 쪼임만 못하리.’

간찰(簡札)은 두껍고 질긴 한지(韓紙)나 비단에 쓴 옛 편지다.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한국 지성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선인들의 간찰 중 친구에게 보낸 편지만을 골라 번역하고 편지가 오간 상황과 심정 등을 해설했다. 정몽주 등 고려시대 3명, 이황 등 조선시대 선비 24명의 간찰이 책에 실렸다. 학문적 고독, 정치적 불안감을 토로하거나 친구에게 조언을 구하는 간찰과 저자의 해설을 읽다 보면 선인들의 표정과 태도, 성격이 눈앞에 만져질 만큼 생동감 있게 떠오른다.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이황과 조식은 동갑에 같은 지역에서 명성이 높았지만 평생 대면하지 못했다. 이황이 조식에게 교유를 청하며 쓴 장문의 편지는 늘 사정을 두루 살피고 조근조근 말하는 이황의 태도를 보는 듯하다. 반면 관직에 나가기를 거부한 조식이 계속 벼슬살이를 해 온 이황에게 ‘(내겐) 세상을 바르게 보는 능력이 부족하니 안약을 보내어 눈을 밝게 열어 달라’고 쓴 답장에서는 조식의 다소 매몰차고 칼칼한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또 이덕무가 박지원에게 마지못해 ‘이목구심서’를 빌려준 뒤 책을 돌려달라고 채근하면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해학적인 편지에는 ‘산해경’을 패러디한 유머와 ‘다빈치 코드’의 암호처럼 글자를 해체하고 조합하는 장난기가 듬뿍하다.

옛 편지의 정중한 형식 안에 감춰진 ‘한 영혼이 다른 영혼과 관계를 맺기 위해 모색하는 긴장’을 드러내 보여 준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