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맛따라]선암사 가는 길, 봄맛을 만나다

  • 입력 2006년 4월 2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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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일기사식당의 주인 배일순 씨. 23년째 매일 오전 5시반이면 어김없이 주방에 나온다.
진일기사식당의 주인 배일순 씨. 23년째 매일 오전 5시반이면 어김없이 주방에 나온다.
입맛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겨울이 오면 군내 나는 오모가리 김치에 끌리고, 봄이 오면 향긋한 봄나물이 간절하니. 아마 몸이 스스로 계절의 향미를 원하는 듯하다.

게으른 눈빛은 봄꽃 풍광에 반짝이고, 짧은 입은 풋풋한 봄 푸성귀에 연연하는 나른한 봄날. 문득 떠오른 곳이 있다. 선암사(전남 순천시 승주읍)다. 봄이면 청매화 홍매화 벚꽃 목련 동백 춘백 등 하얗고 붉은 꽃으로 꽃 대궐을 이루는 곳. 그러나 그보다 더 ‘봄 밝힘증’을 부채질하는 것은 선암사가 아니라 그 길목 식당의 봄 냄새 향기로운 소반상이다.

호남고속도로 승주 나들목을 나와 22번 국도로 가다가 만나는 857번 지방도.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오른편 공터 앞에 ‘진일기사식당’(전남 순천시 승주읍 신성리)이 보인다. 하필이면 기사식당? 이런 의문도 일리 있다. 전국 맛집을 소개해 온 이 난에서 기사식당은 처음이니.

이 공터는 호남고속도로 개통 당시 승주 나들목이었다. 그 나들목이 7, 8년 전에 현 위치로 옮겨 가면서 식당만 남았는데 간판은 그대로다. ‘진일’은 ‘진입로에서 제일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식당을 낸 이는 배일순(73) 씨. 23년 전 일이다. 당시 손님은 주로 트럭 운전사였다. 음식이라고 해봐야 집에서 해먹는 것과 같은 반찬에 돼지비계와 고기를 푸짐하게 얹어 프라이팬에 끓인 김치찌개를 더한 한정식. 그런데 남도의 손님상은 상다리가 휠 정도로 푸짐한 게 특징이어서, 아무리 당시 기사식당의 1200원짜리 밥상이라고 해도 다름없이 반찬 열너덧 가지에 찌개까지 올랐으니 인기를 끈 것은 당연했다.

저렴한 가격에도 그만한 밥상이 가능했던 것은 주인의 정성 덕분이었다. 남편은 밭에서 시금치 쑥갓 등 채소를 키우고 안주인 배 씨는 된장 고추장 간장을 직접 담갔다. 이런 방식은 지금도 변함없어 맛이 그대로다. 식당 옆 텃밭에서는 지금도 푸성귀가 자라고 있다.

전남 순천시 승주읍 진일기사식당의 상차림. 5000원짜리로 17가지 반찬이 나온다. 순천=조성하 여행전문기자

상차림을 보자. 갓김치, 산초 넣어 알싸한 열무김치, 고들빼기, 굴 넣고 버무린 무김치, 묵은 배추김치, 시금치 고사리 콩나물 도라지 취나물 머위 등 나물, 가자미구이, 양념게장, 전어내장젓과 정어리젓을 뒤섞은 전어속젓, 깻잎장아찌, 계란찜, 그리고 김치찌개와 쑥국, 밥.

이즘의 상차림은 봄빛이 짙다. 된장으로 무친 머위와 취나물, 깔끔한 갓김치는 봄날의 깔깔한 입맛을 일순에 바꿔 놓을 만큼 향취가 기막히다. 봄꽃으로 뒤덮인 선암사가 지척이니 선암사 여행길에 들른다면 입으로도 눈으로도 봄맛을 느끼기에 제격이다.

이 식당에는 원칙이 있다. 첫째, 음식은 배 씨가 그날 만들고 다음 날에는 절대 쓰지 않는다. 배 씨는 23년째 매일 오전 5시 반에 주방에 나온다. 둘째, 장 젓갈 김치는 직접 담근다. 찌개용 김치도 별도로 담그는데 약하게 양념한 김치로 끓여 낸 김치찌개는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셋째, 혼자 온 손님에게도 1인상을 낸다. 혼자 다니는 트럭 운전사를 위해 시작한 이 식당의 전통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 4500원이던 음식값은 지금 500원 올랐다. 이 가격에 한 사람 상을 차려내도 수지가 맞을까. 며느리 서정엽 씨(43)의 대답이다. “밥 먹고 살 정도는 됩니다. 워낙 찾는 분이 많아서….”

○여행정보

▽찾아가기 △진일기사식당:호남고속도로 승주 나들목∼22번 국도(구례 방향)∼857번 지방도(순천 방향). 선암사까지 6km △선암사:진일기사식당∼857번 지방도∼죽학 삼거리∼832번 지방도∼괴목(사하촌)∼주차장. www. seonamsa.co.kr 061-754-5247 △식당 이용:오전 7시∼오후 9시 반 영업. 추석 설 연휴에만 쉼. 061-754-5320 ▽길따라 맛따라 패키지 △당일=29, 30일, 5월 1, 6, 7일 출발. 선암사∼진일기사식당∼지리산 할미봉(철쭉 군락). 3만8000원. 승우여행사(www.swtour.co.kr) 02-720-8311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 동백… 영산홍… 겹벚꽃… 꽃물 든 山寺▼

봄꽃이 만개한 선암사 경내.

봄에 선암사는 찾는 이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언제 가도 꽃이 만발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에는 하얀 겹벚꽃이 피었다. 3월 내내 피고 지던 동백과 춘백의 빨간 꽃도 건재하다. 영산홍도 빨간 꽃을 피워 청매화 홍매화 지고 난 뒤 무채색이었던 고찰을 다시 화려하게 채색했다.

주차장에서 절까지 오르는 산길의 작은 계곡에도 봄빛이 역력하다. 물가의 가지마다 연둣빛 봄물이 올랐고 봄비 덕분에 불어난 물이 흐르는 소리도 청아하다. 계곡 가로지르는 승선교의 우아한 자태는 새로 놓은 뒤에도 변함없고, 그 다리 뒤로 선녀처럼 사뿐히 내려앉은 누대 강선루도 아름답기가 그지없다.

이 어울림을 뒤로 하고 길가 야생 차밭을 지나면 일주문이다. 문 곁 고목의 마른 가지에까지 ‘봄물’이 푸르게 들었다.

태고종 총림의 선암사는 백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찰. 고색창연한 당우 20여 채가 절 안에 핀 꽃나무와 잘 어울린다. 선암사의 봄꽃 시즌은 매화 피는 3월부터 겹벚꽃이 폭발하듯 만개하는 5월초까지. 팔상전의 풍경 소리가 요즘 활짝 핀 겹벚꽃의 풍치를 선경으로 휘몰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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