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큰별’ 신상옥감독 별세

  • 입력 2006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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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밤 80세를 일기로 작고한 신상옥(申相玉) 감독은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영화인이다. 그는 납북과 북한 생활 그리고 탈북이라는 자신의 모진 체험조차 영화로 집중시킨 골수 영화인이었다.

1926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그는 1945년 일본 도쿄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미술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데뷔작은 김광주 원작의 ‘양공주’를 각색한 ‘악야(惡夜)’였다. 1953년 톱스타 최은희 씨와 결혼하면서 화제를 뿌렸고 이후 ‘무영탑’(1957년) ‘동심초’(1959년) ‘돌아온 사나이’ ‘로맨스 빠빠’(이상 1960년) 등을 통해 한국 대표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신 감독은 1976년 부인 최 씨와 이혼했고, 최 씨는 1978년 1월 사업차 홍콩에 갔다가 실종됐다. 해변을 산책하다 당시 북한 노동당 서기였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를 받은 괴한들에 의해 보트에 태워져 북한 남포항으로 끌려간 것. 그 후 6개월 뒤 최 씨를 찾으러 홍콩에 간 신 씨마저 납북됐다.

북한에 협력할 것을 거부한 최 씨는 4년 9개월간 가택 연금됐고, 신 감독도 정치범이 수용되는 감옥에서 네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83년 재회한 두 사람은 탈출을 모의하면서 탈출하기 전까지 2년 4개월간 1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때 만든 ‘불가사리’(1985년)는 2000년 7월 국내 극장에서 상영된 북한 영화 1호로 기록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납북 8년 만인 1986년 3월 북한 영화의 서방 진출을 타진한다는 명목으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갔다가 미국대사관에 진입해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후 미국에 머물면서 1987년 다시 혼인신고를 했고 1989년 귀국했다. 이후 신 감독은 대한항공(KAL)기 폭파 사건을 다룬 영화 ‘마유미’(1990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 사건을 다룬 영화 ‘증발’(1994년) 등을 만들었다.

그는 199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2002년 프랑스 도빌 아시아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았으며, 2003년 ‘상록수’(1961년)는 칸 영화제 회고전을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2002년에 만든 ‘겨울 이야기’(주연 신구). 75번째 감독작이었으나 미개봉작으로 남아 있다.

2004년 2월 C형 간염에 감염돼 간 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이후 기력이 급격히 쇠해져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 보름 전쯤 갑자기 상태가 악화됐다.

정부는 12일 신 감독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 씨와 아들 정균(영화감독) 상균(미국 거주), 딸 명희 승리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영결식은 영화인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15일 오전 8시. 장지는 경기 안성시 천주교 공원묘지. 02-2072-2091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영화밖에 몰랐던 사람인데…” 부인 최은희씨 통곡

“평생의 동지를 잃었습니다”
신상옥 감독의 부인 최은희 씨가 12일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신 감독의 빈소에서 눈물을 흘리며 ‘평생의 동지’를 잃은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 신원건 기자

“제 가슴이…, 미어져요. 지금도 눈앞에 서 계신 것 같아요.”

12일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의 신상옥 감독 빈소를 지키던 최은희(80) 씨는 남편을 영원토록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둘 작정인 듯했다. 연방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훔쳐내면서도 그는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1953년 영화 ‘코리아’를 통해 만난 두 사람은 긴 세월동안 인생의 희로애락과 예술을 함께해 왔다. 신상옥 최은희 씨는 부부의 연을 넘어 영화를 위한 평생의 동지였다.

“감독님과 저는 평생 함께 작업해 왔어요. 납북된 뒤 북한 당국이 알려주지 않아 서로 생사를 모르고 애태우던 5년을 빼면 한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어요. 인생의 고비마다 함께했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요.”

최 씨는 언젠가 국제영화제에 참가한 신 감독이 여배우의 청을 못 이겨 춤을 함께 추다가 여배우의 발을 밟은 일화를 소개하면서 “감독님은 술도 담배도 노래도 춤도 도박도 몰랐다. 평생 영화밖에 몰랐던 사람”이라고 회고했다.

최 씨는 신 감독에 대해 “집에서는 벽에 못 박는 일도 못할 정도로 영화에만 인생을 모두 투자한 사람”이라면서 “몇 년간 영화 ‘칭기즈칸’을 만들고 싶어 했지만 투자자를 찾지 못해 절망했다. 참 자유분방하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분이었는데…”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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