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742년 헨델 ‘메시아’ 초연

  • 입력 2006년 4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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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헨델(1685∼1759)의 ‘메시아’는 연말 연초 연주회의 단골 레퍼토리다. ‘메시아’가 대중 앞에서 처음 연주된 때는 1742년 4월 13일이었다. 아일랜드 더블린의 피셤블 가 대음악회장.

‘왕궁의 불꽃놀이’ 같은 기악곡이나 ‘리날도’ 같은 오페라로도 유명하지만 헨델의 대표작은 역시 ‘메시아’다. 고전음악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특별하거니와 작곡가 개인에게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인생 역전의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영국 왕실의 후원으로 30여 년 런던에서 음악 활동을 하면서 헨델은 이름을 날렸다. 그는 웅장하고 진지한 이탈리아식 오페라가 영국에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사회를 풍자하는 내용의 영어 오페라가 등장해 인기를 끌면서 헨델의 오페라에 쏠린 대중의 관심을 빼앗아 가기 시작했다. 영어로 노래하는 데다 내용이 피부에 와 닿았던 것.

앞으로 계속 런던에서 오페라 제작자로 살 수 있을까 회의하던 헨델에게 때마침 아일랜드 총독이 더블린 초청공연을 제안한다. 헨델은 더블린으로 옮겨 9개월여 머무르면서 ‘메시아’를 포함해 수차례 연주회를 연다. 런던을 제치고 더블린이 ‘메시아’ 초연의 영예를 차지한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메시아’는 오라토리오다. 오라토리오는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오페라지만 동작이나 의상, 무대장치를 쓰지 않는 경제적인 장르다. 영어로 만들어져 관객들이 이해하기도 쉬웠다. 헨델이 오페라 대신 오라토리오를 선택한 것은 이런 대중성을 의식해서다.

‘메시아’의 대본은 헨델의 친구이자 신학자였던 찰스 제넨스가 성경 구절 중에서 예수의 일생을 뽑아 썼다. 헨델은 메시아의 수난을 예고하는 부분을 작곡하면서 종교적 감동이 북받쳐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메시아’ 초연을 앞두고 이미 다른 연주회를 두 차례 했기 때문에 성악가와 연주자들과는 웬만큼 호흡이 맞춰진 상태였다. 공연장이 수용할 수 있는 관객은 최대 700명. 공연을 앞두고 신문에서는 여성 관객에게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페티코트를 입고 오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그만큼 반응이 뜨거웠다.

‘더블린 저널’ 4월 17일자에는 “경탄하는 청중이 홀을 가득 메웠고, 그들이 이 작품에서 받은 최고의 환희는 필설로 다 묘사할 수 없다”는 리뷰가 실렸다. 그날의 감동이 수백 년간 재현돼 왔음은 물론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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