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권재현]고전 번역 외면하는 교수들

  • 입력 2006년 4월 5일 03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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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교수들이야 고상한 이론만 연구하려 하지 자칫 흙탕물을 뒤집어쓸지도 모를 번역에 매달리려 하겠습니까.”

지난달 31일 서울 중구 쌍림동 한국교육학술정보원에서 열린 ‘한국고전번역원 및 부설 고전번역대학원’ 설치 방안에 대한 공청회장에서 나온 말이다.

토론자로 나선 허남진 서울대 교수는 몇 년 전 한학(漢學)에 조예가 있는 서울대 교수 50여 명을 모아 ‘동양고전협동과정’을 개설하려 했다가 좌절한 경험을 털어놓으며 고전 번역에 대한 교수들의 무관심을 지적했다.

이날 발제를 맡았던 신승운 성균관대 교수도 “한국학중앙연구원(옛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이 만들어질 때 고전 번역이 왕성하게 이뤄질 걸로 기대했는데 이론 연구에만 몰두하지 않았느냐”며 “대한민국 교수들은 번역은 허드렛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참석자 대부분이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요즘 학계에서뿐 아니라 일반인도 고전의 원전 독해와 재해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척박하다. 우리 한문 고전의 70%가량이 번역이 안 된 상태다. 중국의 공식 역사서인 25사(史)도 번역이 채 안 됐다.

‘종의 기원’과 함께 찰스 다윈의 양대 저술로 꼽히는 ‘인간의 유래’, 현존 사회학자 중 가장 유명한 위르겐 하버마스가 1981년 펴낸 대표작인 ‘의사소통행위이론’ 같은 책이 이제 겨우 번역된 것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셈이다.

“논문 하나 쓰는 것보다 제대로 된 번역을 내놓는 것이 몇 배는 힘들어요. 그렇게 고생해 봤자 평가도 못 받고, 돈이 안 된다고 출판사도 외면하는데 왜 번역에 매달리겠습니까.”

지난해 말 조지프 슘페터의 대표작 ‘경제발전의 이론’을 국내 처음 번역한 박영호 한신대 교수의 말이다.

우리 학계는 아직도 이론 타령이다. 그렇다고 세계적 이론과 경쟁할 수 있는 한국형 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주목할 만한 이론이 나온 것도 아니다.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는 속담이 있다. 후속 학문 세대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이제 우리 학계도 석박사 논문을 통해 거창한 이론만 만들어 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고전부터 착실히 번역해야 한다. 고전 번역이 바로 세계적 이론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다.

권재현 문화부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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