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파격 비장 섬세… 한뼘 붓놀림에 울고 웃었다

  • 입력 2006년 4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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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연재소설은 한편 한편이 역사와 당대 민중의 삶에 대한 문학적 기록이었다. 1920년 4월 1일 창간호부터 ‘민우보(閔牛步)’라는 필명으로 연재된 민태원(閔泰瑗)의 연재소설 ‘부평초(浮萍草)’부터 지난달 연재를 마친 이문열(李文烈)의 역사소설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에 이르기까지, 동아일보 지면은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서 중요한 줄기를 형성해온 장편 소설들이 태어난 산실이었다. 그런데 매일 매일 연재소설을 기다리는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원천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소설과 더불어 실리는 삽화였다. 연재소설의 삽화는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 시각적 미학적 기능을 수행하는 동시에 당대의 삶과 미학을 한눈에 보여 주는 풍속도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동아일보 연재소설 삽화는 1922년 포아고베의 ‘철가면’을 번안한 민태원의 ‘무쇠탈’에 처음 실렸다. 하지만 이때는 삽화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다.

처음 자기 이름을 걸고 삽화를 독자들에게 선보인 작가는 한국 삽화의 선구자로 꼽히는 안석주(安碩柱)였다. 그는 1923년 연재된 나도향(羅稻香)의 소설 ‘환희’를 맡았다.

‘환희’는 남녀 간의 얽힌 관계와 욕망을 그려 장안의 화제가 된 작품. 삽화 가운데는 남자가 여자의 옷을 벗기려는 장면을 그린 것도 있었는데, 요즘 기준으론 전혀 자극적이지 않은 수준이지만 당시엔 ‘한국 최초로 남녀 정사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환희’에 이어 연재된 이희철(李熙喆)의 소설 ‘읍혈조(泣血鳥)’의 삽화는 당대의 화가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이 그렸다. 근대 산수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노수현은 이후에도 동아일보 연재소설의 삽화가로 자주 이름을 올렸다.

1939년 석가탑이라는 아름다운 문화재에 얽힌 사연을 통해 민족혼을 부각시킨 현진건(玄鎭健)의 ‘무영탑’이 연재됐는데 이 소설의 삽화도 노수현이 그렸다.

노수현은 동아일보에 입사해 만화와 삽화 담당자로 일하다가 이 자리를 가까운 친구에게 물려준다.

그가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이다. 근대 한국화를 빛낸 화가로 널리 알려진 이상범은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까지 대부분의 동아일보 연재소설 삽화를 도맡아 그렸다.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가 1931년 연재한 소설 ‘이순신’, 1933년작 ‘흙’의 삽화를 통해 이상범은 ‘이순신’의 민족적 자긍심, ‘흙’의 계몽 정신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상범은 1936년 손기정(孫基禎)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신문사를 떠나야 했지만 삽화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7년 전인 1965년 정한숙(鄭漢淑)의 소설 ‘이성계’에 이르기까지 계속 삽화를 그렸다.

서양화가들도 신문 삽화를 맡아 신문에 이름을 올렸다. 1958년 이무영(李無影)의 소설 ‘계절의 풍속도’에 박고석(朴古石)이, 1970년 박경수(朴敬洙)의 소설 ‘흔들리는 산하’에 최영림(崔榮林)이 삽화를 맡았다.

원색의 채색화로 ‘천경자 화풍’을 만들어낸 천경자(千鏡子) 화백도 소설가 박경리(朴景利) 씨와 함께 1964년 연재소설 ‘파시(波市)’에서 호흡을 맞췄다.

1979년 연재된 방기환(方基煥)의 소설 ‘어우동’도 장안의 화제였다. 소설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김세종(金世鐘) 화백이 그린 삽화가 너무 인기 있어 그림만 따로 모으는 독자들도 숱했다.

1983년 연재된 최인호(崔仁浩) 씨의 인기소설 ‘겨울 나그네’의 삽화를 맡은 이우범(李友範) 화백은 ‘민우와 다혜의 이뤄지지 못한 안타까운 사랑’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올해 3월 31일 대단원의 막을 내린 이문열 씨의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는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동아미술제에서 수상한 한국화가 박순철(朴順哲) 씨가 삽화를 맡아 항우와 유방의 밀고 밀리는 숙명의 대결을 섬세하고 힘 있는 터치로 재현해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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