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향기속으로 20선]<3>신갈나무 투쟁기

  • 입력 2006년 3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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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쓰러지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생명 활동을 해왔지만 죽음 앞에 절대 번민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순환이 있기에. 사람처럼 복잡한 절차와 형식을 가지지도 않고 죽음 앞에 부산스러움도 없다. 그저 살아가는 활동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자신이 주저앉은 그 자리가 바로 무덤이요 저승이다. ―본문 중에서》

나는 제법 책 읽기를 좋아하는 축에 속한다. 생명의 탄생, 인류의 진화, 그리고 과학소설이 내가 즐겨 읽는 분야이다. 나무를 좋아해서 식물에 관한 책도 눈여겨본다. 이런 책들은 더러 어려운 전문서적이거나 외국 저작물이 많다. 그런데 여기 반가운 책이 한 권 있다. 우리의 필자가 우리의 독자를 위해 쓴 책 ‘신갈나무 투쟁기’.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갈나무다. 신생아 도토리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부터 싹이 트고 100일, 숲의 전사로 성장한 13세, 꽃을 피우고 성년식을 치른 20세, 그리고 숲의 어엿한 주인이 된 50세를 거쳐 생을 마감하는 100세에 이르는 신갈나무의 일생을 그린 일대기이다.

그런데 글을 써 내려간 저자의 화법이 매우 특이하다. 땅에 떨어지자마자 데굴데굴 굴러 나무에서 멀어진 도토리를 묘사한 대목을 보자. 저자는 도토리가 되어 “세상에 던져진 후 어미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고, 겁나고 힘겨울수록 어미의 넉넉했던 품이 더욱 그립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 줄에서는 나무가 되어 “부모 자식 간이란 멀어질수록 피차에 이롭다는 사실을, 어린 신갈나무는 아마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알게 될 것이다”라고 도토리 어미의 심정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시 냉정한 과학자로 돌아가 “어미의 그늘 아래에서 이로울 게 하나도 없는 것이 나무의 부모 자식 간이다”라고 설명한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 한 톨을 두고서 이렇게 여러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는 점이 이 책의 독특한 맛이다.

물론, 저자들의 시선은 신갈나무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책에는 250가지가 넘는 풀과 나무의 이름이 등장하며, 저자들이 이산 저산 헤매고 다니며 찍은 사진 200컷이 실려 있다. 줄기와 뿌리가 구분 없이 하나로 붙어 있는 도토리 해부 그림, 어린 잎 뒷면의 털을 확대한 사진, 민들레 씨앗의 비행을 이끄는 날개옷 등 볼수록 신기한 그림이 많다. 또 중간 중간에 글 상자를 마련해서 ‘가장 오래 산 나무’와 같은 식물에 대한 지식과 재미있는 정보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옹골찬 내용을 256쪽의 작은 책에 담아낸 편집도 돋보인다.

책을 쓴 식물학자 차윤정과 전승훈은 부부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 부부가 나무를 자식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또는 저자들이 나무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무의 삶을 어찌 이렇게 우리네 인생살이처럼 그려낼 수 있겠는가. 책의 마지막 대목, 나무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에서 저자들은 마치 자신의 죽음을 관조하고 있는 것 같다. “그저 흙으로 돌아가는 이치이거늘, 이처럼 단순하고 명쾌한 순리가 어디 있는가. 땅의 자양분을 먹고 자라 다음 세대를 위해 자양분으로 돌아가는 일. 미련이 있을 수 없다. 죽는 일이란 모든 생명이 가지고 있는 절대 속성이 아닌가.”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리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오명돈 서울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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